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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지 리뷰: 담론의 비트를 만드는 집단 지성의 목소리
계간지 리뷰: 담론의 비트를 만드는 집단 지성의 목소리
  • 최익현 문화평론가
  • 승인 2003.1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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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참호 속에서 대안을 모색하다

2003년 겨울 계간지의 흐름을 보면, 활자매체를 보루로 한 한국지식인 사회의 집단 지성이 각각의 자기 매체를 통해 담론의 '비트'를 줄기차게 만들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이른바 담론의 땅굴 혹은 근거지를 강화하기란, 어떤 의미에선 계간지의 존재방식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마땅찮은 점이 있다면, 담론의 재생산 혹은 자기 주장의 세련화에서 종종 발견되는 '소통의 부재' 현상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당대비평'과 '창작과비평'은 이번 겨울호에서도 지난 가을호에 잇닿아 있는 연속기획을 마련했다. 당대비평의 연속기획은 '한국사회의 편견과 차별의 구조 9-중년'이고, 창작과비평의 연속기획은 특집 형태로 탐구된 '한국사회의 발전전략을 찾아서(21세기 한반도 구상3)'다.

둘다 좌담의 형태고, 의제설정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이 두 계간지에서 서로 가로질러 읽어낼 수 있는 지점은 '창비'의 '발전전략' 아래 묶인 김왕배 연세대 교수의 글 '계층의 불평등과 형평의 원리'와, '당대'의 특집 '겨울 길목, '1987 체제'라는 희망의 덫' 아래 수록된 신광영 중앙대 교수의 '중산층의 위기, 표준과 상승의 몰락'이 아닐까 생각한다. 두 글 모두 어떤 '기시감'의 그늘 아래 있지만, 비교적 글쓴이의 고민과 걱정이 선명해서 독자를 크게 배신하지 않을 것 같다.

한국사회 중산층 위기론과 그 진단
김 교수의 논지를 정리해보자. 이제 한국사회는 생계보장형의 빈민층 및 저속득층, 정리해고 및 소득증대와 함께 나타난 노동력 재생산비용의 상승 등으로 빈곤의 가능성에서 자유롭지 않게 된 중산층들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시급히 요청되는 시점에 이르렀다는 것. 국가는 이들이 시장에 접근할 수 있도록 역량을 키워주어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일은, 이들 계층의 '자발성' 강화다.

국가에 의한 수혜나 서비스 차원의 사회복지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공동이익을 위해 조직화하고 의사결정에 참여함으로써 물질적인 자원뿐 아니라 정신적인 자원의 분배를 획득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김 교수는 사회적 시민권의 확대와 제3섹터를 기반으로 한 지역공동체운영을 한국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치유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제시한다. 문제는 이들 중산층이 어떻게 '자발성'을 한층 더 강화할 수 있느냐의 문제일 텐데, 논의는 아직 여기까진 나아가지 않았다.

신 교수의 글은 좀 길게 따라 읽어야 한다. 부제는 '왜 중산층의 위기가 우리 모두의 위기인가'다. 한국의 문제는, 중산층 위기가 아니라 전체사회의 위기라는 주장이다. 이른바 중산층이란, 한강의 기적이 불러온, 일종의 성공신화. 지금 그 신화가 해체되면서 위기론이 팽배해지고 있지만 사실, 민주화 이행 과정에서 중산층만큼 혜택을 본 계층도 없다.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 자유의 최대 수혜자가 바로 이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경제적 풍요가 훼손될 것을 두려워해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노동3권 보장, 노동운동의 활성화에 반대했는데, 노동운동을 중산층이 누리는 경제적 혜택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중산층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고용 불안정과 소득 불안정으로 인해 더 이상 과거와 같이 안정된 삶을 구가하는 것이 힘들어져서다. 노동시장에서의 불안정한 지위와 신분상승 기회의 폐색을 골자로 한 중산층 위기는, 사실에 있어 성공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강한 성취동기의 근저에 놓여 있었던 중산층 이데올로기의 위기이기도 하다.

이들 중산층은 자신들의 보수성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보호할 아무런 조직적, 제도적 장치를 갖추지 못했다. 경제적 풍요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나마 제한적이었던 정치적 민주주의조차 자기 손으로 지켜낼 수 없는 셈이다. 이것은 1997년 경제위기를 계기로 그 이전에 형성됐던 1987년 체제의 위기이기도 하다.

'1987 체제'라는 개념에 대해 '당대'측의 설명을 우회하면, '급속한 소비 자본주의화'와 '제도 형성의 주요 원리로 제도 안으로 틈입한 민주화'라는 두 바퀴가 떠받치고 있는 정치경제적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오늘 우리가 맞고 있는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 '1987 체제'의 문법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는 지적인데, 신 교수의 글도 이러한 '배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신 교수가 글을 맺으면서 "그 위기는 노동계급과 중산층 모두의 위기로 다가오고 있다.

위기를 극복할 새로운 대안이 필요한 시기이다"라고 썼을 때,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독자들이 어디에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대안 모색'을 미루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지나치게 일국적, 내부적 위기 진단이라는 생각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어쩌면 처음부터 '새로운 대안'을 모색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것은 아닐까. 사족이지만, 박형준 동아대 교수의 '1987년 체제를 넘자'라는 글도 선언적 의미 이상의 울림을 주지 못하고 있다.

'황해문화' 10년, 그 현실감각
'문화/과학'은 자신의 이론 진지에 참호를 구축하고 있는 인상이다. 특집으로 '과학기술의 사회적 쟁점들'을 내걸면서, '문화/과학-과학혁명과 문화연구의 변증법적 절합'('문화/과학' 편집위원회), '과학·기술과 공공공간'(히라카와 히데유키), '정보화와 인권, 그리고 헌법'(한상희), '자연과학의 혁명과 인간의 개념'(박성수), '지식기반 생산체제의 계급적 성격'(이상락) 등을 수록했다.

흥미로운 점은, 권두언에서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과학 사이의 대립적 반목을 청산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으려는 '문화/과학'의 고심"을 담았다거나, "세 과학을 이접적(disjunctive)으로 분리시키는 태도와 연접적(conjunctive)으로 동일시하는 태도로부터 모두 거리를 두면서 세 과학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맺음 방식으로 연결을 제시한다."고 밝혔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편집진의 의도나 기대사항일 뿐, 실제 동원한 필진들은 자연과학이 배제된 형태다.

이렇게 본다면, 이들 논의는 애초부터 '대화성'이라는 '연결고리'를 생략한 것으로 읽힌다. 혹시 '대립적 반목'의 실마리를 위해 인문사회과학 쪽에서 먼저 고해성사를, 혹은 인문사회과학의 희망사항을 상대방에게 털어놓기 위해서였을까.

창간10주년을 맞은 '황해문화'를 빼놓을 수 없다. '인천' 나아가 '황해'라는 문화거점을 두고 발언하고 있는 이 잡지의 10년 무게는 과소평가하기 어렵다. 특집으로 마련한 '세계, 지역 그리고 새로운 미래'(김호기, 정성진, 조희연·서복원, 김타균)는 이 잡지의 10주년 기념 심포지엄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황해문화' 10년의 무게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정성껏 마련한 특집 '세계, 지역 그리고 새로운 미래'가 아니라, 작가 최인훈이 19년만에 발표한 단편 '바다의 편지'다. 자기 과업을 수행하다 귀환하지 못하고 바다에 수장된 어느 남파 공작원 청년이 죽음 이후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으로 된 이 소설은 소설사적으로 '광장'과 '해전'의 계보를 잇지만, 이보다 더 민족사적인 한반도의 분단 현실, '엄존하는 냉전 이데올로기 속의 바다와 그것을 초극하는 바다'의 형상화라는 점에서 돋보인다.

어쩌면 바로 이런 감각이 '황해문화'를 단순한 향토주의 계간지로 고착될 수 있는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튕겨내는 눈썰미가 아닐까. 바다, 황해의 이미지인 동시에 한반도의 현실로 확장되는.

중국은 왜 한국고대사에 집착하는가
'역사비평' 겨울호는 예사롭지 않다. 송기호 서울대 교수와 윤휘탁 동아대 연구교수가 참여한 '중국 '동북공정'과 한국고대사 빼앗기'가 워낙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송 교수는 '중국의 한국고대사 빼앗기 공작'을, 윤 교수는 '현대중국의 변강·민족인식과 '동북공정''을 각각 발표했는데, 이 두 글은 자칫하면 한-중 외교분쟁으로 치달을 수 있는 정치적 사안을 차분하게 학술적으로 논구했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요점은, 통일 한국 이후를 겨냥 중국정부가 만주일대와 북한 영토의 연고권을 내세우기 위해 집요하게 고대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 발해사를 자국 역사의 귀퉁이에 편입한 데 이어, 고구려를 중화민족사의 일부분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이 정부 후원하에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아마, 이 사안은 남북역사학계가 공동으로 대처하는 게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몸집 큰 주제에 맞서 다윗과 골리앗 같은 전투를 벌이진 않았지만, 이상의 계간지들은 일회적이거나 단속적인 지적 고민에 그치지 않고 '참호'를 파 내려가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으로 읽힌다. 다만, 이들 참호들이 각개 전투의 참호마냥 서로 동떨어져서 지적 연쇄망을 좀처럼 형성하지 못하고 '에콜'의 문제의식으로 협애화되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는 것을 덧붙이고 싶다.

최익현 / 문화평론가

 

겨울 문예지들은 무얼 담았나

문학잡지들은 올 한해 문학계 흐름을 돌이켜 보거나, 또는 기존에 논의됐던 주제들을 새롭게 다듬어 특집으로 준비했다. ‘문학과 사회’의 특집은 그동안 논의돼왔던 ‘한반도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다. 한반도분단의 가장 강력한 대중이데올로기인 민족주의를 저널리즘 텍스트를 통해 기호학적으로 분석, 비판한 김태환의 글이 주목을 끌만하다. 가장 풍성하게 채워진 건 ‘비평·논문’ 섹션이다.

 최근 한 신세대 여성주인공의 독특한 성적 처세의 정치학을 다뤄 주목을 모은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작가 정이현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평론가 우찬제씨가 그녀의 페이소스 밑바닥에 도사린 근원적존재론적 질문을 던졌다. 조남현은 평론가 정명환과 오생근의 비평집을 비교하면서 이론비평과 실천비평의 순환을 짚어내는 데 공을 들였다. 김윤식과 복거일이 친일문제를 어떻게 다뤘나비교 검토하는 부분도 흥미롭다.

‘문학동네’의 렌즈에 포착된 이는 화제의 소설가 김영하다. 구한말 신세계를 향한 조선인들의 항해를 이산과 유랑의 서사로 구현한 그의 ‘검은 꽃’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역사소설이라 평가받는다. 황종연이 뉴욕 땅에서 김영하를 만나 이민자로서 정담을 나눴고, 서영채가 ‘아이러니’라는 화두로 이 소설을 읽어버렸다.

특집은 최근 몇 년간의 ‘장편소설의 성과’를 구체적으로 따져봄으로써 우리 소설의 새로운 흐름을 점검하는 자리로 마련했다. 류보선은 최근 한수산의 ‘까마귀’나 이청준의 ‘신화를 삼킨 섬’의 출간을 새로운 소설사의 지형도로 주목하고 있다. 김형중은 여성작가들의 활약에 초점을 둬 배수아, 조선희, 전경린, 최윤 등의 최근 장편소설들이 문학자체를 여성화하고 있음을 읽어내고 있다.
이은혜
기자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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