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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의의 문학프리즘] 무릇 ‘대의’는 성찰과 함께 해야
[심영의의 문학프리즘] 무릇 ‘대의’는 성찰과 함께 해야
  • 교수신문
  • 승인 2020.05.25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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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시기를 역사적 배경으로 한 윤정모 선생의 소설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는 여성의 몸에 대한 제국주의적 식민주의 침략을 상징하는 한편 남성 중심적 유교문화와 민족주의의 희생자였던 일본군 성 위안부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름 없이 죽은 일본군 성위안부들의 흔적과 목소리까지 담아낸 이들 소설들이 의미 있는 것은 국민국가의 틀 속에 있는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의 기억이 그들- 일본군 성위안부들의 기억과 연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숙고하게 한다는 점에 있다. 요컨대『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를 비롯한 일련의 위안부 관련 소설은 ‘우리’가 일본군 성위안부들의 고통과 기억에 연대하는 집합적 기억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반면 ‘수요 집회’는 직접적으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그들의 사죄를 요구하는 자발적인 운동으로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최근까지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왔다. 국내외에 소녀상을 건립하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널리 각인시키는 데에도 상당한 기여를 해왔다. 그런데 최근 관련된 한 분의 조금 ‘다른 목소리’가, 그리고 그분들을 위해 오랜 시간 헌신해왔다는 한 활동가와 관련한 추문은 많은 이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당장에는 일본의 전쟁 책임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하고 있으며, 운동 내부는 물론 많은 국민들에게 무언가 잘못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게 한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위안부라는 용어는 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군에 의해 강제 동원된 성 노예 여성들을 지칭하고 있다. 즉 위안부라는 용어는 민족의 수난과 치욕, 민족의 일원인 여성의 수난을 상징했고, 따라서 민족적 분노의 표현으로 소비되고 있다. 식민주의자에게 있어 언제나 여성은 정복된 사회의 전리품이거나 사용 가능한 그 사회의 문화이거나 자원이라면, 식민지의 민족주의자에게 여성은 보호되어야 하는 민족의 도덕이고 자신이 보호해야 하는 민족의 자산이 된다. 식민주의와 민족주의 담론 모두에서 중요한 것은 여성과 도덕을 연결 짓는 것이다. 여성의 도덕성이란 규제된 성을 의미한다. 식민지 지배가 끝나도 식민지적 유제와 봉건적 전통의 결합은 다시 여성을 대상화하고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더구나 훼손된- 더럽혀진 몸으로서의 ‘위안부’는 남성-국가-민족의 수치이자 가부장의 위기가 된다. 따라서 그들의 경험은 은폐되고, 그들의 언어는 침묵을 강요당한다. 

용기 있는 증언과 연대를 바탕으로 전개되었던 운동이 정작 당사자 중 한 사람의 ‘다른 목소리’와 헌신의 진정성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 이른 것은 불행한 일이다. 대의를 위한 누군가의 헌신이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결여할 때, 그것은 누구를 혹은 무엇을 위한 헌신이었는가에 대한 질문 앞에서 무력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무엇이거나 누구 혹은 무엇을 위한 헌신이라는 주술에서 깨어나 그 일이 내 숙명이었을 따름이었다는 겸손한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다른 목소리’를 감정적으로 배척하기보다는 그동안의 운동이 부지불식간에 어떤 강박에의 집착은 없었는지, 그리고 한 두 사람의 독단적인 운영으로 민주적 참여를 배제한 잘못은 없었는지를 돌아볼 계기로 삼는다면 한 단계 성숙한 운동으로 승화될 것으로 생각한다. 위안부 문제는 결코 종결된 것이 아닌 까닭에 더욱 그러하다. 

심영의 문학박사. 소설가 겸 평론가.
심영의 문학박사. 소설가 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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