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00:50 (금)
대학정론-모차르트가 살아있다면
대학정론-모차르트가 살아있다면
  • 박홍규 논설위원
  • 승인 2003.12.1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양의 왜곡된 동양관을 비판하고 동양의 참된 모습을 논의하는 학술회의에서 서양인이 한 기조발제를 비판했다가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 자리에서도 서양인의 견해를 경청할 필요는 물론 있겠으나, 그것에 대한 비판이 반드시 무례는 아닐 것이다.

세계화 탓으로 서양인과의 직접적인 교류가 늘어나는 것은 바람직하나, 서양인의 학술 발표나 예술 공연이 반드시 충실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마치 지방에서 지방인보다 서울인의 그것이 무조건 높이 평가되는 경향이 문제이듯이 한국인보다 서양인의 그것이 무조건 높이 평가될 이유는 없다. 물론 서양 문화에 대해 서양인이 한국인보다는 그 원래의 모습을 더 잘 안다는 전제는 가능하나, 그렇다고 하여 서양인의 견해를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이야기는 문제이다.

예컨대 18세기 작곡가인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죠반니’를 초연 당시 그대로 공연하는 이른바 '원전' 공연이 국내 최초로 행해졌다고 떠들석했다. 당시 관객이었던 귀족을 위한 바로크 스타일로 음악보다도 현란한 무용과 화려한 의상 등을 중시했다는 그것은 절제된 양식화로 종래 공연의 중후한 느낌과는 전혀 다른 경쾌한 모습을 보여주어 마치 흥겨운 뮤지컬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초연시 진부한 도덕성의 강조로 실패한 것처럼 이번 공연에서도 감동은 없었다. 심지어 예컨대 여인을 속여 유혹하기 위해 두 남자가 서로 다른 사람으로 변장하는 장면에서 초연 시에는 분명 그렇지 않았으나, 이번 한국 공연에서는 두 사람의 체구가 아이와 어른처럼 너무 달라 웃음이 나왔다. 결핵으로 죽어 가는 비올레타가 너무 거대한 몸집이었던 탓으로 초연이 실패한 베르디의 ‘트라비아타’를 '원전' 공연하는 경우는 어떻게 할까.

물론 이번 공연은 다양한 연출로 유명한 그 작품의 수많은 해석 중의 하나일 수 있다. '원전'임을 강조하는 새로운 해석이 갖는 가치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백년간 수없이 행해져온 그 다양한 해석이 거의 없는 채 '원전'이라는 이유로 그것이 본래 모습인양 먹힐 우려도 있다. 그래서 모순된 욕망에 따라 낡은 도덕을 벗어나 자유롭게 행동하는 현대적인 개인의 창출이나, "자유 만세'라는 합창곡 등으로 모차르트가 부여하는 봉건사회에 대한 저항이라는 바로크에 반하는 요소는 오히려 무시될 가능성도 있다.

모차르트가 지금 이 땅에 살아있다면 그런 18세기의 실패한 진부한 도덕양식의 바로크 오페라를 상연했을까. 지금 우리에게 서양의 '원전'이란 도리어 그런 현대적인 의미에서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