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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의 계절, 그러나
산타의 계절, 그러나
  • 홍성태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03.12.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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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올해의 마지막 새달을 맞았다. 다음 번 새달은 올해가 아니라 새해의 새달이다. 이렇게 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 돌이켜 보면, 언제나 그렇듯이, 한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이 바쁘기만 했던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12월은 산타의 계절이 됐다. 빨간 옷을 입은 배불뚝이 할아버지가 빨간 코 사슴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날아와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고 간다는 이야기는 이미 꽤 오래 전부터 이 땅의 아이들을 사로잡았다. 이제는 선물을 주는 나이가 된 사람들도 산타클로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산타클로스의 이야기는 이미 꽤 오래 전에 ‘우리’의 이야기가 돼 버린 것이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도 산타클로스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까닭은 그것이 이 세상에서 도무지 실현될 것 같지 않은 축복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은 너무나 험하고 무섭기 때문에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만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 없다. 이 세상이 너무나 험하고 무섭기 때문에 산타클로스의 이야기는 소중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오늘날 산타클로스의 이야기는 사실 더 이상 축복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 지도 모른다. 이미 지난달부터 이 나라의 곳곳에는 산타클로스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산타클로스가 날아올 날은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는데, 산타클로스를 내세운 장사는 벌써부터 활발하게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산타클로스가 이 나라의 곳곳에 나타나던 그 무렵, 이 나라의 곳곳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대적으로 쫓겨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외국인 노동자들도 나타났다. 쫓겨나지 않겠노라고 결심한 외국인 노동자들은 명동성당과 성공회대성당에 천막을 치고 이 나라의 반인권적 외국인 노동자 추방정책에 온몸으로 맞서고 있다.

산타의 계절. 그러나 오늘날 산타클로스는 축복과 구원에 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축복과 구원의 산타클로스는 이미 오래 전에 멸종돼 버린 것 같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가짜 산타클로스들만이 넘쳐나고 있다. 축복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무시당하고,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외면당하고 있다. 산타의 계절은 죽음을 강요하는 노숙과 추방의 계절이 돼 버렸다.

그러나 어디엔가 산타클로스가 아직 살아 있다고 믿고 싶다. 축복과 구원의 믿음을 안고 거짓과 폭력에 맞서는 사람들은 아마도 산타클로스의 진실을 알 것이다. 축복과 구원의 믿을 안고 사는 그들이 바로 살아 있는 산타클로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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