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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의시간-대학교육과 평점제도
나의 강의시간-대학교육과 평점제도
  • 정남영 경원대
  • 승인 2003.12.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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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영 경원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
몇 년 전부터 시험이 어떤 형식으로 나오냐고 물어보는 학생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메일 등을 통해 사정이 이러저러하므로 성적을 좀 올려줄 수 없느냐고 호소하는 학생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한번도 들어주는 적이 없다. 평점부여에 있어서 내가 견지하는 원칙은 ‘무조건 엄정하게’이다. 현재의 평점제도를 신봉해서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현재의 평점제도는 없어지고 전혀 다른 차원의 평가제도가 들어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다만 아직 이런 생각이 넓게 공유되지도 않고 실제로 평점제도를 철폐하는 움직임이 가시화되지도 않은 상황에서는, 엄정함이 현재 제도의 폐해를 가장 최소화하리라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내가 현재의 평점제도를 원칙적으로 거부하는 이유는 크게 셋으로 나뉠 수 있다.

첫째, 인간의 능력을 질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수량적으로 평가하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문제다. 인간의 자질을 수량적으로 평가하겠다는 발상은 서양에서 벤삼의 공리주의의 등장과 함께 생긴 것인데, 이 사고방식은 자본이 사회를 장악해 나가는 데 막강한 도움을 주었다. 자본의 지배란 모든 사물을 가치량으로 환원시키는 것을 그 핵심으로 하는데, 공리주의가 바로 이것을 정당화하고 당연시하는 사고방식을 유포하기 때문이다. 자본에 고용되어 생산에 투여되는 인간의 능력을 수량화한 것이 바로 임금이다. 전통적으로 자본은 임금에 차등을 둠으로써, 즉 노동력의 수량적 가치를 서열화함으로써 한편으로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부추기고, 다른 한편 총임금의 양을 줄여왔다. 평점제도란 예비노동력의 서열화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 졸업장제도와 평점제도는 노동시장에서 노동력을 차별화할 필요에 의하여 형성되었거니와, 학생들이 평점에 신경을 쓰는 이유도 자신의 예비 노동력의 등급을 높이려는 데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수들의 평점부여란 기본적으로 자본의 사회적 요구에 응하는 제도이다.

 

둘째, 현재 대부분의 대학에서 채택하는 평가제도는 교육과 아무런 내적 연관이 없는 제도다. 현재의 제도는 학생들을 특정 시점에서의 능력을 기준으로 줄을 세우는 것이며 따라서 입학시험과 원리적으로 동일하다. 교육의 본령은 줄세우기가 아니라 학생의 능력을 높이는 데 있다. 따라서 교육의 성과는 학생의 능력이 향상된 정도를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즉 어떤 학생이 강의를 수강하기 전의 능력이 어떠한데 학기를 마쳤을 때 어떻게 향상되었는지를 초점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평점제도는 이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

 

셋째, 교육행위란 교수와 학생이 교육시설 및 행정지원을 매개로 서로 만나는 활동이므로 이 중에서 학생만을 따로 떼어서 평가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만일 어떤 학생이 좋(지 않)은 학점을 받았다면 그 이유는 선생에게도 일부 있을 수 있고 시설 혹은 행정지원의 (불)충분성에도 일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왜 학생만이 일방적으로 평가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학생들이 교수들의 강의를 평가하는 제도가 최근에 대부분의 대학에서 정착되기는 하였지만,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고, 오히려 연구업적평가제도처럼 대학의 실질적인 노동력인 교수들의 능력을 서열화하는 쪽에 가깝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평점제도를 당장 어쩔 수는 없지만, 내 강의실에만큼은 평점에 대한 의식이 들어설 여지가 없도록,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이 되도록 노력한다. 그래서 시험의 형식을 묻는 학생들에게, 성적을 올려달라고 호소하는 학생들에게, 다시는 그런 질문이나 호소가 반복되지 않도록, ‘결코 안됩니다’라고 차갑게 선언하는 것이다. 또한 평점제도의 불가피한 ‘식민지’인 시험시간을, 학생들로 하여금 그 동안 축적한 지식을 쏟아놓기보다는 마지막으로 집중적으로 사유하며 고민하게 함으로써, 조금이나마 교육을 위한 시간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그 대가로 학생들로부터 시험이 너무 어렵다는 소리를 듣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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