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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담형 인간
민담형 인간
  • 조재근
  • 승인 2020.05.19 14: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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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담형 인간
민담형 인간

 

신동흔 지음 | 한겨레출판사 | 312쪽

《살아있는 한국 신화》로 영화 〈신과 함께〉의 모티브를 제공한 구비설화 전문가 신동흔 교수가 이번에는 무기력의 시대, 낯설고도 놀라운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민담형 인간’이라는 화두를 내놓았다. 캐릭터 분석을 통해 동서양 민담을 새롭게 읽어내는 시도이다.

집단 안에서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를 총칭하는 설화는 크게 신화, 전설, 민담으로 나눌 수 있다. 신성하고 위엄 있는 이야기인 신화나 역사적인 근거를 가진 전설과 달리 민담은 흥미 위주로 된 옛이야기로, 대부분 특별할 것 없는 보통 이하의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저자는 30여 년 동안 세계 각지의 민담 속 주인공들을 만나면서 그들에게 신화나 전설, 소설 속 인물과 다른 특별한 동선(動線)이 있음을 발견한다.

저자는 민담형 인간이 “뒤에 몰래 딴마음을 감춰두지 않으며”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치고 “자기 욕망에 충실”한 캐릭터라고 설명한다. 지난해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EBS의 ‘펭수’, 〈아기공룡 둘리〉의 ‘둘리’, 〈톰과 제리〉의 ‘제리’가 전형적인 민담형 캐릭터이다. 〈신데렐라〉, 〈알라딘〉, 〈미녀와 야수〉 등 세계 각지의 민담을 원작으로 한 만화영화들도 민담형 캐릭터를 활용해 관객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민담형 캐릭터가 오늘날 이렇게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즉각적이며 거침이 없”고, “평면적이고 투명하며 독립적”인 이들의 특성이 무기력이 만연한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공하기 때문으로 분석한다.

저자에 따르면 민담형 인간의 반대쪽에는 ‘소설형 인간’이 있다. 근대에 발명된 이야기 형식인 소설이 인간을 분열된 내면을 가진 존재로 탐구하기 때문이다. 민담 속에 소설형 인간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림 형제 민담 속 주인공 ‘영리한 엘제’가 대표적이다. 엘제는 자기가 세워놓은 곡괭이에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맞아 죽는 상황을 떠올리면서 통곡하는 인물이다. 엘제처럼 소설형 인간은 행동에 나설 줄 모른 채 불안에 갇혀 고뇌하고, 생각이 많아 간단한 일을 복잡하게 만든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특징이다. 이에 반해 민담형 인간은 어떻게든 행동에 나서고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친다. 한국 민담 〈구렁덩덩 신선비〉 속 주인공은 자기가 결심하고 선택한 일을 끝까지 밀고 간다. 구렁이에게 시집을 가고, 가족의 시샘 탓에 자신을 떠난 남편을 찾아 위험을 아랑곳 않고 길을 떠난다.

신화의 특징적인 캐릭터가 ‘영웅’이고 소설의 두드러진 캐릭터가 ‘개인’이라면, 민담을 대변하는 캐릭터는 “트릭스터(trickster)”다. 트릭스터는 한마디로 “제 욕망을 이루기 위해 수단에 개의치 않고 거침없이 움직이는 행동파 인물”이다. 저자는 트릭스터의 대표적인 예로 두 가지 민담을 꼽는데, 그림 형제 민담 속 주인공 ‘용감한 꼬마 재봉사’와 19세기 경주에 실존한 것으로 전해지는 ‘천하명물 정만서’이다.

트릭스터는 어떤 일이든지 복잡하게 고민하지 않고 그저 “자기 삶을 산”다. ‘용감한 꼬마 재봉사’는 파리 일곱 마리를 천 조각으로 한 방에 처치한 뒤 자신에게 용사의 자질이 있다고 믿으며 길을 떠나 거인을 물리치고 마침내 왕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자기 능력을 의심하며 망설이거나, 미래를 불안해하지 않는다. ‘천하명물 정만서’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죽어봐야” 죽음이 무엇인지 알 것 아니냐고 눙치는, 어느 이야기 속 주인공보다 괴짜에 가까운 인물이다.

저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옛이야기’를 30여 년 동안 연구한 구비설화 전문가이다. 전국을 다니며 신화와 전설, 민담을 수집해 《도시전승 설화 자료 집성》, 《시집살이 이야기 집성》 등의 자료집을 펴냈으며, 《살아 있는 한국 신화》, 《세계 민담 전집1-한국 편》 등 구비설화 관련한 다수의 책을 출간했다.

캐릭터를 코드로 글을 이끌어가고 있지만 이 책 속에는 전문가의 눈으로 선별한 주옥같은 동서양 민담이 31편이나 들어 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경쾌한 문체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세계 각지의 평범한 사람들이 남긴 오래된 지혜를 만날 수 있다. 좀 낯설고 엉뚱해서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그들이 나타내 보이는 자유로움과 제대로 접속하고 나면 그 매력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그래! 인생 뭐 있나. 저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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