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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리어의 오월 노래
호텔리어의 오월 노래
  • 조재근
  • 승인 2020.05.19 14: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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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리어의 오월 노래
호텔리어의 오월 노래

 

홍성표 (일지, 메모) , 안길정 (기획 , 집필) 지음 | 빨간소금 | 186쪽

광주관광호텔은 8층 건물로 도청 앞 광장과 금남로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맞은편 오른 측면에는 전일빌딩이 있었다. 5ㆍ18이 일어나자 관광호텔은 자체 폐점했지만, 영업과장이던 홍성표는 그곳에 남아서 5ㆍ18의 열흘을 목격할 수 있었다. 광주에서 관광호텔은 10층 건물인 전일빌딩 다음으로 높았다. 위에서 아래를 보면 아래에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시위 군중 속에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책은 지난 40년 동안의 모든 증언들과 다르게,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공간과 높이에서 본 5ㆍ18을 보여준다.

호텔리어 홍성표는 열흘 동안의 5ㆍ18을 놀라울 정도로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국회 청문회에서 증언하지는 못했지만, 아마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지난 40년 동안 수백 번 되새겼기 때문일지 모른다. 5ㆍ18에 대한 존중과 부채감을 그는 소상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의 기억에는 공식 기록에서 읽을 수 없는, 때로는 위급하고 때로는 따뜻한 상황들이 생생하게 펼쳐져 있다. 처음 광주항쟁에 입문하는 이들도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홍성표의 5·18 관련 목격담이 책의 중심에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광주 체류를 다룬 장이 책의 시작과 끝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책의 구조로 보았을 때 5·18이 두 개의 청산해야 할 군사정권 사이에 끼어 있는 셈이다. 사실 홍성표는 두 개의 군사정권을 설명할 수 있는 적격자이다.

저자는 호텔리어 경력을 광주관광호텔에서 시작했다. 기획·집필한 안길정에게 그의 기억 가운데 제일 인상적인 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1박 2일 호텔 체류였다. 내로라하는 기자들이 청와대 속사정을 파헤친 글이 시중에 나도는데, 대개는 얻어들은 이야기에 의존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는 호텔에서 직접 보고 겪은 것이 대부분이다. 동선(動線)에 따른 권력자의 행적은 다른 어느 책에도 나오지 않는 새로운 발굴이다. 대통령 전용실의 위치, 집기, 그 안에서 벌어진 일은 안길정의 심문에 가까운 추궁 끝에 복원되었다. 아마 유신 체제를 겪어본 장년층은 대통령의 하룻밤 호텔 체류 장면을 읽으면서 각급 정보·군사 기관이 총동원되는 철통같은 경호 태세에 절대 권력의 실체를 실감할 것이다.

끝에서 두 번째 장은 전두환의 광주 방문에 얽힌 이야기이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체육관 선거는 유신의 심장 박정희가 설계했지만, 그것을 계승하고 향유한 이는 철권통치자 전두환이었다. 이 이야기 역시 호텔리어로서 구술자의 목격담 내지 청취담으로 꾸몄다.

당대 최고 권력자들의 호텔 체류 이야기를 생생하게 복원할 수 있었던 까닭은 광주관광호텔의 위상 때문이었다. 당시 광주관광호텔은 지역 유지들의 사교장이자 매월 기관장회의가 열리는 곳이었고, 대통령이 투숙하는 이 지역 최고의 영빈관이었다. 당시 지방에는 대통령이 묵을 도지사 공관이나 영빈관이 없었으며, 귀빈이 묵을 스위트룸을 갖춘 고급 호텔은 오직 광주관광호텔뿐이었다.

이 책의 마지막(김정한 교수의 ‘해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한 사람은 관광호텔에 있었고 한 사람은 도청에 있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의 인연이 40년 만에 이 책의 운명이 되었다. 운명이라니, 이게 무슨 말일까? 이 책의 저자는 둘이다. 홍성표가 구술, 일지, 메모를, 안길정이 기획, 집필을 맡았다. 둘은 2017년 국방부 헬기사격조사위원회를 통해 처음 만났다. 홍성표는 증언자였고, 안길정은 조사위원이었다.

하지만 알고 보면 둘은 1980년 5·18 때 넓게 보아 같은 공간에 있었다. 홍성표는 호텔리어로서 광주관광호텔을 지켰고, 안길정은 대학생으로서 도청을 사수했다. 5월 27일 새벽, 홍성표는 호텔을 점령한 계엄군을 맞닥뜨렸고, 안길정은 도청에서 계엄군에 맞서 마지막 항쟁을 이어갔다. 둘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남아” 40여 년 만에 만났고, 이 책의 공동 저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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