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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박상진
단테×박상진
  • 조재근
  • 승인 2020.05.19 13: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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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박상진
단테-박상진

 

박상진 지음 | 아르테(arte) | 256쪽

이 책의 저자 박상진은 단테의 글에 나타나 있는 그의 행적을 바탕으로 그가 밟았을 땅, 올려다보았을 숲과 하늘, 손을 적셨을 냇물, 그의 눈길이 머물렀을 공간을 따라간다. 사실 단테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단테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대부분 그 자신이 말한 것이기에 그의 글을 토대로 삶과 시대를 해석하며 흔적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단테의 대표작인 『신곡』을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관련 연구서도 다수 펴낸 저자의 전문적 역량이 빛을 발한다.

국내에서 단테 연구의 권위자로 꼽히는 저자는 단테의 인생 전반기 주무대인 피렌체에서부터, 망명의 출발지이자 『신곡』 서두에 나오는 ‘어두운 숲’의 배경이 된 카센티노 숲을 거쳐, 죽음과 함께 20년 망명 생활의 종지부를 찍은 라벤나까지 여행한다. 그러면서 무엇보다도 “단테의 글이 주변의 사물을 어떻게 재현했는지 관찰하고, 이를 통해 당시에 일어난 사건을 상상하고 그의 생각을 이해하려 애썼다”라고 말한다.

즉 단테가 직접 보고 듣고 만져보았을 물질세계가 그의 작품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직접 확인함으로써 오랫동안 글로만 만났던 단테를 보다 생생하게 만난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신곡』에서 내세를 돌아보는 순례자 단테는, 길 위에 선 유랑자 단테의 자전적 비유였다. 그는 이탈리아반도를 정처 없이 떠돌며 직접 눈으로 본 풍경을 내세를 묘사하는 데 고스란히 사용했다. 비평가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말처럼 『신곡』은 내세에 대한 이야기이면서도 현세의 핵심을 놀랍도록 잘 간직하고 재현했다”라고 말한다.

“최후의 중세 시인인 동시에 최초의 근대 시인”. 카를 마르크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을 쓴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단테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런가 하면 20세기 현대시의 선구자로서 단테를 오랫동안 사숙하기도 한 T. S. 엘리엇은 “호메로스, 단테, 셰익스피어를 모르면 근대시를 이해할 수도 비판할 수도 없다. 단테와 셰익스피어가 근대를 나누어 가졌다. 제3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며 극찬했다.

신 중심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중세가 저물어가고 인간의 재발견으로 집약되는 근대가 밝아오는 과도기에 활동했던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1321). 그는 문명사적 거대한 변환의 한복판에 있던 이탈리아 북부 피렌체에서 태어나 문학청년이자 정치가로서 반평생을 보냈고, 이후 죽을 때까지 이어진 망명 생활의 와중에 『신곡』을 집필함으로써 문학의 르네상스를 열었다.

죽음 이후의 내세를 여행하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지금 여기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반추하게 하는 『신곡』은, 고대부터 중세까지 면면히 내려온 문학적, 철학적, 종교적 유산의 총집결장이자 근대 문학의 심원한 원천이 되었다. ‘망명 문학’을 대표하는 이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단테는 호메로스, 셰익스피어, 괴테와 함께 서양 문학의 4대 시성으로 불렸다. 아울러 단테 스스로 중앙의 식자층 언어인 라틴어에 능통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러 지방어들 중 하나인 토스카나어로 집필함으로써 지방어도 라틴어 못지않은 훌륭한 언어임을 보여주었다. 이로써 후일 토스카나어가 통일 이탈리아의 표준말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인생의 정점에서 첨예한 정쟁에 휘말리며 기나긴 망명길에 올라야 했던 단테였지만, 자신이 속한 터전에서 떨어져 나와 은둔하는 그 ‘우월한 고립’의 실현은 그를 오히려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작가로 만들어주었다. 그는 더 이상 피렌체에 속하지도 않았고, 당대에 머물지도 않았다. 거대한 교향곡과도 같이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여행하며 인간 삶의 모든 국면을 총체적으로 담아내고자 한 그의 위대한 시도는, ‘인간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을 깊이 간직한 이들에게 여전히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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