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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 59] TV로 인한 폭력과 음란의 노출
[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 59] TV로 인한 폭력과 음란의 노출
  • 교수신문
  • 승인 2020.05.18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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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노출도

자살, 폭력, 칼, 가위, 란제리 속옷 노출 등
TV 10분만 봐도 각종 폭력성과 선정성에 노출돼

노출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러니까 어떤 개체나 집단에게 어떤 사건이나 현상이 얼마나 자주 벌어지는가를 따지는 것이다. 폭력에 노출된다, 음란물에 노출된다. 광고에 노출된다, 언론에 노출된다, 이렇게 쓴다. 

우리말의 용법으로는 빈번(頻繁)함 정도가 좋다. 그런데 빈번은 많다는 쪽으로 그 반대로 희소할 수도 있으니 중립적으로 노출이라는 말로 객관화시키려는 것 같다. 노출도가 그 대표적인 예다. 빈번할 빈에는 이미 자주라는 말이 들어가니, 빈도(頻度)보다는 노출도가 나은 모양이다. 이를테면 ‘글에서 한자의 노출이 많아’는 ‘한자가 너무 잦아’ 또는 ‘많이 나와’라는 뜻인데, 요즘은 이렇게 쓰는 것이다. 

덕분에 원래 갖고 있는 노출(露出; exposure)의 의미는 약해지고 있다. 신체의 노출, 사진의 노출(감광시간), 집의 노출(방위)와 같은 사실적인 현상보다는 관념화되고 추상적인 데 쓰이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위험에도 노출된다. 

오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바로 폭력과 음란의 노출 문제다. 평소는 잘 모른다. 그러나 모든 언론을 끊고 인터넷도 닫고 일주일을 있어보라. 그럼 우리가 얼마나 폭력과 음란, 다시 말해 피와 살인을 비롯하여 시기와 질투 그리고 복수에 휘둘리고 있는 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노출도를 따지는 것은 아주 쉽다. 지금부터 텔레비전을 켜고 돌리면서 위에서 말한 것이 10분 동안 얼마나 나오는가를 세보면 된다. 지금 바로 해보자.

요즘은 아파트에서는 유선방송이 의무적이라서 채널을 다 돌려보기도 전에 10분이 지났다. 그동안 나온 것이 이렇다. 자살, 폭력, 질투, 사기, 방화, 돈 가방, 그리고 피다. 폭력으로는 뒤통수로 쳐 기절시키는 장면이 나왔고 무기로는 칼, 가위, 총이 나왔다. 총은 이 방송 저 방송해서 여덟 자루 정도 나온 것 같다. 칼은 뿌옇게 하는데 이상하게도 총은 그렇게 안 하더라. 나도 지금 처음 알아차렸다. 

채널을 고정시켜 유선방송 연속극을 10분 동안 본다. 배우의 란제리 속옷 노출로 끝나는 줄 알았더니 싸우다 속옷 위에 걸친 가운을 결국 벗기고 만다. 그리고는 폭력으로 팔뚝 잡고 흔들기, 밀치기가 나온다. 남자에 잡혔던 여배우의 팔뚝이 울긋불긋하다. 고함치며 싸우고 막말을 한다. 그러더니 다른 장면으로 가더니 스마트폰 사진에서 남녀가 침대 위에서 옷 벗고 있는 사진 대여섯 장이 뜬다. 

시간을 정확히 재기 위해 스톱워치를 틀어놓고 보았다. 전쟁 장면만 본 것이 아닌데도 이렇다. 다른 영화에서는 총만이 아니라 전투기와 미사일도 나왔다. 

이것이 우리의 상황이다. 이처럼 폭력성과 선정성의 노출도가 높다. 10분 만에 텔레비전 이곳저곳에서, 10분 만에 한 드라마에서 이렇게 노출된다. 직접 당장 해보시라. 

이런 것을 어떻게 느끼게 되었냐고? 산속에서 침잠하다 속세에 나오면 이상한 울렁증이 생기는 것을 스스로 느끼면서다. 오랜만에 문명세계로 들어오면 교통시설로부터 오는 약간의 어지러움도 있지만, 더욱 놀란 것은 우리의 텔레비전이 쏟아내고 있는 엄청난 양의 폭력(violence)에 대한 메스꺼움이었다. 평소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나를 더 부끄럽게 만든다. 그만큼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산중 생활을 통해 나는 내가 평소 얼마나 사람을 죽이거나 때리는 장면을 일상으로 보고 있는지, 시기와 질투 그리고 사기를 생활 속에서 받아들이고 있는지, 나의 욕망을 일으키는 돈과 몸에 익숙한지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난감(難堪)한 피폭(被爆; 被暴)이다.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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