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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 수능 혹은 상상력의 폐색
문화비평 : 수능 혹은 상상력의 폐색
  • 조현설 고려대
  • 승인 2003.12.04 00:0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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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언어영역 17번 문제 때문에 우리 사회가 비싼 비용을 치르고 있다. 복수정답에 대한 문제제기와 그 확산과정, 그리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복수정답 인정과 3?5번 정답자 사이의 공방 등은 새삼 교육현장이 첨예한 이해의 각축장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나는 이 시비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관전자의 처지지만 할 말이 없진 않다. 그건 17번 문제가 내 학문적 관심사인 신화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17번 문제의 문제가 정답 자체에 있다고 보진 않는다. 문항의 요구대로 ‘유사한 기능’을 따진다면 ‘미궁의 문’(테세우스-문-미궁)이 백석 시의 ‘의원’(나-의원-고향)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내 관심은 표현의 위계가 전혀 다른 걸 단지 ‘기능’이라는 편리한 관점으로 엮어버리는 태도가 과연 온당한가 하는 점이다. 이처럼 손쉬운 문제를 통해 수학능력시험이 표방하는 수험생의 언어 이해능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시와 신화는 非일상어라는 ‘모국어’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를 연관지어 읽는 게 중요하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출제위원들의 설명으로는 6차 교육과정 문학과목 해설서에도 그렇게 적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시와 신화의 무리한 연관짓기는 오히려 언어에 대한 이해를 저해할 뿐이다. 그리스 신화의 테세우스가 고구려 신화의 유리처럼 아버지를 찾아 나선 전형적인 영웅이라면, 나아가 유리와는 달리 투쟁이 강조되는 영웅이라면 백석의 시 ‘고향’의 ‘나’는 심신이 병든 범인이다. 테세우스의 괴물과의 투쟁이 자신의 영웅성을 증명하는 과정이라면 ‘나’의 의원과의 만남은 병을 치유하는 과정일 뿐이다. 어떻게 ‘나’와 ‘테세우스’를 동일한 층위에서 ‘기능’만 가지고 연관시킬 수 있단 말인가.

수능보다 더한 문제는 교과서에 있다. 근래 7차 교육과정에 맞춰 새로 나온 중학교 3학년 2학기 국어교과서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상당한 분량으로 실려 있는 그리스 신화 ‘길 잃은 태양마차’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야기 뒤편에 붙어 있는 ‘목표학습’이라는 일종의 학습지침 때문이었다.

‘목표학습’의 첫 번째 지시문은 “파에톤의 행동에 대해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적어 보자”고 제안하면서 옆에 (어머니의 맹세를 듣고도 태양신을 찾으러 떠남→아버지가 파에톤을 아들이라고 인정하지만, 더 정확한 징표를 원함→아버지가 여러 차례 마차를 모는 어려움과 위험을 말하지만 소원을 바꾸지 않음→마차를 몰면서 당황하다가 뒤늦게 후회를 함)과 같은 식의 도표를 만들어 놓고 괄호를 채워보라고 유도한다. 그리고 이어진 두 번째 지시문은 “태양 마차가 산산조각이 나기 전에 파에톤이 어머니, 아버지, 양아버지에게 남겼을 마지막 말을 상상하여 적어 보자”고 제안한다.

그런데 이 같은 제안이 문제인 것은 먼저 7차 교육과정이 목표로 삼고 있는 교사와 학생들의 재량이나 창의적 상상력을 스스로 억압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모순보다 더 한심한 것은 '목표학습'이 신화에 대한 오해를 조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현명한’ 교사가 없다면 학생들은 대부분 파에톤과 같은 문제아로 찍히지 않기 위해 ‘엄마 아빠 말을 잘 들을 걸…’, 이런 식으로 괄호 안을 채울 것이다. 그리고 신화를 교훈의 텍스트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것이 과연 창의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는 신화에 대한 적절한 교육의 방향일까?

사실 '길 잃은 태양마차'에서 신화적으로 더 중요한 부분은 “아버지의 마차를 몰던 파에톤, 여기에 잠들다. 힘이야 모자랐으나 그 뜻만은 가상하지 아니한가”라고 새겨진 비문이다. 이 비문은 오히려 아버지를 거역한 ‘문제아’의 행동을 가상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신화적 언술은 '목표학습'의 의도를 정면에서 반박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 더 바람직한 신화 교육의 태도가 아닐까?

신화에 대한 오해와 무관하지 않은 교육현장의 두 풍경은 신화 교육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비난하는 듯하다. 굳이 그리스 신화를 교과서에 싣고, 수능 문제로 출제한 이들의 신화에 대한 편식도 문제지만 그 편식이 만들어낸 신화에 대한 설익은 이해가 불필요한 교육비용을 억지로 요구하고 있지나 않은지 깊이 생각해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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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2003-12-09 12:49:21
조현설 선생님... 죄송합니다. 고쳤습니다.

필자 2003-12-08 13:26:48
그런데 이 같은 제안이 문제인 것은 먼저 7차 교육과정이 목표로 삼고 있는 교사와 학생들의 재량이나 창의적 상상력을 스스로 억압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모순보다 더 한심한 것은 <목표학습>이 신화에 대한 오해를 조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현명한’ 교사가 없다면 학생들은 대부분 파에톤과 같은 문제아로 찍히지 않기 위해 ‘엄마 아빠 말을 잘 들을 걸…’, 이런 식으로 괄호 안을 채울 것이다. 그리고 신화를 교훈의 텍스트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것이 과연 창의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는 신화에 대한 적절한 교육의 방향일까?

사실 <길 잃은 태양마차>에서 신화적으로 더 중요한 부분은 “아버지의 마차를 몰던 파에톤, 여기에 잠들다. 힘이야 모자랐으나 그 뜻만은 가상하지 아니한가”라고 새겨진 비문이다. 이 비문은 오히려 아버지를 거역한 ‘문제아’의 행동을 가상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신화적 언술은 <목표학습>의 의도를 정면에서 반박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 더 바람직한 신화 교육의 태도가 아닐까?

신화에 대한 오해와 무관하지 않은 교육현장의 두 풍경은 신화 교육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비난하는 듯하다. 굳이 그리스 신화를 교과서에 싣고, 수능 문제로 출제한 이들의 신화에 대한 편식도 문제지만 그 편식이 만들어낸 신화에 대한 설익은 이해가 불필요한 교육비용을 억지로 요구하고 있지나 않은지 깊이 생각해볼 때이다.

필자 2003-12-06 10:06:13
-원고 뒷 부분이 잘렸습니다.
-게시된 글 마지막 문단의 "마차를 몰면서 당황하다가 뒤늦게 후회를 함" 뒤에 '→( )'가 빠졌습니다.

수정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