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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화에 대한 미학적 성찰...풍수설 기댄 해석엔 이견
산수화에 대한 미학적 성찰...풍수설 기댄 해석엔 이견
  • 권영필 한예종
  • 승인 2003.12.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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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서평: 『풍경과 마음』(김우창 지음)

 권영필 /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사

이 책은 동양화라는 미술주제를 중심으로 문명비판적인 관점을 부각시킨 노작이다. 특히 ‘산수화’를 자아와 세계 사이를 연결하는 매개체로 보고, 이를 미학적 성찰을 통해 분석한 개발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회화 너머의 세계를 논구한 점은 어쩌면 미술사 연구 자체의 방법론적 지평을 확대한 것일 수도 있다.
때로는 이 책의 각 주제들이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너무도 긴 사유의 터널을 지나야 한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 사유의 과정들도 값진 것이긴 하나, 다소 논리를 분절적으로 만드는 게 아닌가 판단된다. 한두 군데 교정이 덜 된 게 옥에 티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짜여졌다. 첫 장인 ‘감각과 세계’에서 특히 저자는 동양화가 그 구도에서 치중하지 않는 부분이 中景임을 지적한다.(15쪽) 이것은 매우 타당하다. 동양화의 일반적인 경향이 그러하거니와 특히 북송의 米法산수라든가, 元代 倪瓚의 산수가 그런 특징을 보인다.

동양화의 표면(物性)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게 강조되지 않은’ 편이라고 해석한 존 화이트의 견해에는(16-17쪽) 뉘앙스가 담겨 있다. 사실상 수묵화에서의 潑墨과 破墨, 산수화에서의 바위나 산의 준법은 표면을 겨냥한 매우 적극적인 표현법이다. 역사적으로 표면 개발을 위해 기울인 동양화가들의 노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謙齋 鄭敾도 그 점에선 예외가 아니다. 그가 개발한 ‘빗발준’은 화강암질의 한국의 산들을 여실히 묘파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표면’의 문제를 동양화의 정신성 추구 요인과 관련짓는 건 다른 문제인 듯하다. 

회화에 담긴 문화적 규약 해독

한편 산수화의 전통이 단조롭게 된 게 규범적 성격에 기인한다는 점, 그리고 여기에 풍수설이 작용한다는 점 등에 대해서는 저자와 이해를 같이한다. 그러나 이 규범성에서 풍수관념은 한 가닥에 불과하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풍수가 전근대 동양의 어떤 사고 유형의 표현이라 해서 그것이 화가의 산수에 대한 현실체험과 표현의지에 보편적으로 작용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저자 자신이 제2장에서 풍수사상은 동양의 이상향(우주관) 형성에 도교와 신선사상과 함께 부분적 기여를 하고 있음을 밝힌 데(35쪽)서도 드러난다. 더욱이 ‘질서화의 원리’로서의 풍수지리가 중국과 한국의 도시구조에 응용돼 불합리를 노정시킨 점을 강조함으로써 마치 동일한 원리가 전통 회화에도 적용되는 것으로 암시되는 건 적절치 않은 것 같다.

이런 부분적인 시각차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제시하는 것처럼 동양화가 지각체험과 아울러 우주론, 인간론 등의 ‘에피스테메’ 체계 속에 위치해 있음을 확인하는 것(28쪽)은 중요하다. 우리가 동의하는 대로 그것을 통해 보다 풍부한 미래에 대한 표상이 출현한다는 기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2장은 ‘풍경과 선험적 구성’인데, 여기서도 역시 풍수설에 치중하고 있다. 저자가 끌어들인 인간의 두 성향으로서의 ‘안주와 초월의 원리’(어니스트 샥텔)는 ‘땅’에 대한 개념의 외연을 넓혀가는 데 매우 유용하다. 이를 통해 “사람은 현실적으로 높은 산들에 의해 보호된 안주의 땅을 원하면서 그것의 초월적 체험을 구한다”(56~57쪽)는 언표가 빛을 발하게 된다. 이어서 “땅의 미적 체험을 재현하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동양에서는 산수화다”라는 서론적 명제에 도달한다.

동양화의 내재적 원리 규명 노력

▲'懷古', 장우성 作, 1981, 독일퀼른시립미술관 소장. ©
시와 회화를 비교하는 고전적인 관습을 저자도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회화 쪽에서 보면 그 시가 산수화의 특성을 더 돕는 것 같진 않다. 한편 산수화의 이해를 위해서 “문화적 규약의 해독과정”(76쪽)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견해는 타당하다. 다만 이때의 문화적 관습과 공간체험에 대한 예시로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가 적절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그의 작품에서 “관념적 명증성으로 도해된”(81쬭) 특징을 완전히 지워버릴 순 없겠지만, 알려진 대로 겸재는 독특한 조감법의 명수이자, 진경산수의 개창자로서 실경을 스케치해 관념성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화가다. 다시 말해 관념 산수의 일반적 경향이나 전형을 그에게서 찾는다는 건 어색한 일로 보인다.

동양화가들의 산수화 제작이 宗炳의 경우처럼 매양 ‘기억’에 의존하는 것만은 아니다. 한국의 겸재가 그랬듯 중국에서도 가령 盛唐期의 화가 李思訓은 현종의 명에 따라 嘉凌江 삼백여리를 사생해 粉本(스케치)에 담았던 예를 ‘唐朝名畵錄’은 전하고 있다.

저자의 지적대로 회화의 공간이 작가의 문화적 조건에 지배됨은 사실이다. 이 맥락에서 중요한 건 깊이의 공간의 문제인데, 저자가 동양의 삼원법과 서양의 원근법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제시한 “원근법의 고정된 시점은 개인의 중요성이 인식되는 서양사의 전개와 병행한다”(105쪽)라고 한 파노프스키의 대목은 매우 촉발적이다. 왜냐하면 당초부터 동양 그림은 본질상 그런 사정과 대비할만한 조건도 아니거니와 오히려 동양화에서는 그려지지 않은 공간, 즉 여백 공간의 관념적 깊이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앞의 언급대로 산수화와 풍수지리는 일면적인 연결이 있다. 저자는 다시 풍수지리의 실제적 의미가 심미적 감각으로부터 나온 것임을(115쪽) 들고, 거기서 험준하고 무서운 산세보다는 순하고 온화한 산세를 보다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이 산수화에도 해당된다고 했다. 그럴 경우, 郭熙의 ‘早春圖’ 류의 그림들, 소위 북송의 巨碑派의 작품들은 어떻게 설명될 것인가.

어쨌건 이런 미술사의 사례들과의 함의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거시적인 문명사적 관점은 강한 비전을 담고 있다. 합리화된 서구의 공간개념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산수화적 공간의식으로서의 ‘풍경적 이행'(오귀스탱 베르크)론이 오히려 동양의 도시가 무계획적으로 된 것을 꼬집는 역현상에 대해 저자는 각 문화가 가진 ‘땅’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에서 배워야 함을 역설한다. 그게 유토피아로 가는 길이기에. 이 책의 마지막 장인 ‘동양적 전통과 평정한 마음’에서도 동양적 전통의 평정한 마음의 이미지를 화면 속에 어떻게 재창조하느냐가 유토피아를 위한 앞으로의 과제임을 제시하고 있다.

미술작품의 내재적 원리를 밝히고, 그를 통해 한 사회의 문화가치를 측량해 나가는 작업은 결코 수월한 일은 아니다. 그것을 이 저서는 생산적으로 해내고 있다. 끝으로 이 책의 기초이론에서 ‘국산화-자기화’비율이 높았으면 하는 바람을 덧붙이고 싶다.

필자는 파리3대학에서 미술사를 수학하고, 독일 쾰른대학에서 “조선 묵죽화의 비교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박물관 학예사로 재직했으며, 고려대 교수를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미적 상상력과 미술사학’, ‘실크로드 미술’, ‘렌투스 양식의 미술’이 있으며, 역서로는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칸딘스키)’와 ‘조선미술사(에카르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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