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13:50 (목)
인터뷰: 헬가 피히트 전 훔볼트대 교수
인터뷰: 헬가 피히트 전 훔볼트대 교수
  • 이지영 기자
  • 승인 2003.12.0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통일, 문화적 차이 고려해야...'토지'번역중"

"독일 통일의 과정에서 동독의 학자와 연구는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헬가 피히트 전 훔볼트대 교수(69)는 중앙대 한독문화연구소가 주최한 강연 '타자의 시각으로 본 한반도 통일'에서 동독 출신학자로서 겪은 통일의 경험을 털어놨다.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피히트 교수는 독일최초의 한국학 연구자인 동시에, 1960년대부터 북한의 독일대사관에서 일하면서,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통역을 담당해왔다. 훔볼트대 한국학과 성장의 주역인 동시에 남한과 북한의 학계와 문화를 고루 체험했다는 독특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현재 피히트 교수는 박경리의 대하장편소설 '토지'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있기도 하다. 지난달 25일, 피히트 교수를 찾아가 독일의 한국학 현황과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독일의 한국학자 1호라고 들었다. 1세대 학자로서 그간 독일 한국학이 흘러온 과정을 요약해달라.
"독일의 한국학 전통은 서독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동독에서 생긴 것이다. 한국전쟁과 연관한 연구 때문이었다. 독일보다 체코에서 먼저 한국학 연구가 자리잡은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내 경험을 중심으로 이야기하자면, 1954년 훔볼트대에 처음으로 한국학 전공이 생겼고, 내가 그 곳의 첫 입학생이자 졸업생이었다. 훔볼트대의 한국학 연구경향은 처음에는 언어와 문학 중심이었지만, 1970년부터는 지역학 연구로 탈바꿈했다. 물론 당시의 연구는 북한을 중심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남한 사회 연구의 필요성을 알고는 있었지만, 자료도 구하기 어렵고 또 남한에 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와 경제를 전공한 연구자들이 합류함으로써 지역학 연구의 기틀을 잡아가고 있었다. 독일 통일 무렵 훔볼트대는 독일에서 가장 큰 한국학 연구소를 창립했을 정도다. 그런데 지금은 이 연구소가 사라졌다. 연구소뿐만 아니라, 연구자들도 없다. 물론 과거 서독 대학의 한국학과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은 언어와 문학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어서, 지역연구로서의 한국학 전통은 사라진 셈이다."

△통독과정에서 동독의 대학과 학술이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인가.
"지금까지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나에게 독일 통일과정의 갈등에 관한 발언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독일의 통일은 한마디로 흡수통일이었다. 경제적인 문제 등은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이질성과 동질성에 대한 고려를 거의 하지 않았다. 때문에 문화갈등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다. 대학을 예로 들면, 통일과정에서 동독 출신의 교수들은 거의 다 대학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다. 나 역시 그 과정에서 교수직을 그만둬야 했다.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크리스타 콜프나 하이너 뮐러 같이 세계적인 평가를 받는 작가들이 많았음에도 통일 이후 이들에 대한 연구나 평가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독일은 세계 2차대전의 잘못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라는 평가에 빗대어 보면, 이런 반성 역시 1985년 당시 동독의 대통령이 파시즘 희생자에 대한 사죄를 하면서부터 생긴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통일과정에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런 것이었다. 서독은 동독을 완전히 점령하는 방식으로 통일했고, 그 과정에서 동독은 불법적인 국가 또는 범죄국가로 대우받았다. 그 결과 동독의 역사와 문화, 학풍은 응당의 대우를 받지 못했다. 일방적인 통일 방식 때문에 문화 갈등의 실마리를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토지' 번역은 만만치 않은 일일텐데 어려움은 없는가.
"전체 10권 중 2권까지 번역해 출판했다. 3권을 번역해서 출판사에 넘긴 상태고, 내년 초면 출판이 될 것 같다. 번역작업은 어렵다. 너무 힘이 들어서 때때로 후회도 한다. 많은 한국사람들이 사투리 번역과 한국 근대사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느냐 라고 질문을 하는데, 사실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나는 1960년부터 한국에서 지냈고, 또 한국문화와 역사에 대한 다양한 자료가 있기 때문이다. 가장 어려운 것은 박경리가 가지고 있는 사상, 인간상을 표현하는 것이고, 유난히 대화가 많은 이 소설의 묘미를 살리면서 생생하게 옮기는 것이다. 박경리는 천재적인 작가인데, 보통학자로써 이를 응당하게 번역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계속 고민하고 있다."

△굳이 토지를 번역하게 된 이유가 있는가.
"1992년에 대학에서 사임하면서, 취미로 하던 한국문학 번역을 본격적으로 시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박완서의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나'와 윤정모의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를 번역했다. 한국문학사를 잘 모르다 보니 그 이후에는 단편집을 번역하려고 했다. 그런데 자료 수집 중 한국문학통사를 읽게됐고, 그 집필자 모두가 박경리의 '토지'를 최고봉으로 평가하는 것을 보고 번역을 결심했다. 사실 '토지'는 문학적 수준이 높아서 독일에서 잘 팔리는 소설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많이 팔기 위해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교류를 위해 번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작업을 할 생각이다."

△한국 통일 논의에 충고를 한다면.
"독일식으로는 통일하지 말하는 것이다. 일전에 한국에서 열린 학술대회에 참가했다가 "흡수통일 안된다"라는 논의가 있는 것을 보고 행복했다. 무엇보다도 독일통일 연구에서, 서독의 입장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동독의 입장에서도 조명해 줄 것을 바란다. 동독 출신의 인텔리들이 통일 과정에서의 입장과 반성을 한 책들도 많이 출간됐다. 일방적인 통일이 아니라, 서로의 문화적 차이를 존중해 낼 수 있는 방법을 구상할 필요가 있다."

이지영 기자 jiyoung@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