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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것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을 견딜 수 없다"
  • 남송우 부경대
  • 승인 2003.1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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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월평

남송우 / 부경대·국문학

지난달은 올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인들의 손길이 바쁜 계절이었다. 그래서 다른 달에 비해 서점에 선을 보인 시집 수가 눈에 띄게 늘었다.

이들 가운데 정현종, 이성복, 심재상, 김선우의 시집은 한 번쯤 눈길을 줘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집들이 펼쳐놓은 언어의 향연은 가을걷이가 끝나 곡식이 가득한 창고처럼 풍성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정현종의 '견딜 수 없네'(시와시학사 刊)는 耳順을 넘긴 이후 시인이 드러내는 심원한 사유의 세계가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무엇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인가. 세상사 모든 것은 흐르고 변하는 것, 흐르고 변하는 것들은 상흔을 남기는 법, 그래서 그것을 견딜 수 없다고 시인은 고백한다.

그래서 이번 시집에 실린 많은 시편들이 시간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시인이 노래하는 시간의식의 한 핵은 시간은 얻는 것 없고, 잃는 것 뿐('밑도 끝도 없이 시간은') 그래서 시간은 슬픔이란 부정적 인식에서부터 원래 자연이라는('시간의 게으름') 인식에까지 이른다. 그런데 시인이 가장 의미있게 노래하는 시간대는 어스름의 때다.

사그라지는 이 시간대는 자신을 풀어놓을 수 있는 시간이면서, 인생의 어스름인 황혼기란 상징성을 지니는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나긴 고통과 시간의 궁핍을 치유하는 시간의식을 이 시집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별미처럼 느껴진다.

이성복의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열림원 刊)은 시집체제부터 의도적이다. 1백편의 시로 이 시집을 엮었는데, 시 제목 아래 외국시인들의 시를 인용해 놓고, 그 인용시의 내용이나 주제와 상관이 있는 이미지를 산문시로 풀어놓았기 때문이다.

연속적으로 1백편을 펼쳐놓은 이 시집은 이전의 이성복 시인에게서 봤던 상상력의 힘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시편들이다. 표제시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한 편만 봐도 이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달밤에 시인이 그려내는 달에 대한 인상적인 이미지, 딸과 주고받는 유머스러한 대화, 부인을 수로부인으로 상상해 내는 신화적 상상력 등 상상의 고리는 물 흐르듯 끝간 데 없이 펼쳐진다. 그래서 1백편이 이뤄 놓은 시의 화원에는 삶의 풍경 하나하나가 幻花처럼 선연하다.

심재상의 '넌 도돌이표다'(문학과지성사 刊)는 시가 힘을 잃어버린 시대에, 말의 힘을 상실한 '카산드라를 위하여' 노래함으로써 새 이름을 지어주고, 새 얼굴을 빚어주는 작업을 통해 시의 길을 새롭게 열어보려 한다.

그 방법론으로 눈을 닫으면 귀가 열리고/귀 막으면 입이 열린다('망각은 나의 힘')는 길을 택하기도 하고, 눈 지긋이 감고 앉아 씹고 또 씹고 삭히고 또 삭히는('되새김위')는 방안을 모색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숨은 신 같은 보이지 않는 당신('간접조명')과 함께 하는 의식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시인이 추구하는 깊은 의식의 지층을 탐사할 수 있는 시편들이 편재해 있다. 시인의 내면의식과 외부 세계가 만나 어떠한 교직을 통해 하나의 세계가 완성되는 지 엿볼 수 있다.

김선우의 '도화 아래 잠들다'(창비 刊)는 70년대생 시인답게 시어의 발랄함과 시적 발상이 새롭다. 이 새로움은 이 시집이 독자의 눈을 끌 수 있는 시적 매력이다. 시적 세계 역시 모성성을 기반으로 한 생명의식은 실제적인 몸의 이미지에서 출발하고 있어, 그 생동감은 다른 시인들에 비해 훨씬 구체적이다.

몸을 신전으로 인식하는 발상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민둥산'을 통해 "내 몸이 오늘 신전이다"라고 노래하는 과정은 살아 움직이는 시의 힘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여성의 근원적인 생명성을 통해 생명시의 또다른 한 양상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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