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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무아상태 시인처럼 펼쳐놓은 슬프고 아름다운 이스탄불 이야기
[책을 말하다]무아상태 시인처럼 펼쳐놓은 슬프고 아름다운 이스탄불 이야기
  • 교수신문
  • 승인 2020.05.13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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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아래와 땅 위, 이야기 안과 이야기 바깥, 서로 다른 시공간이 얽히고설켜 빚어내는 대 서사

이스탄불 이스탄불 | 부르한 쇤메즈 지음 | 고현석 옮김 | 황소자리 | 392쪽

길이 모두 막혀 아득한 어둠만이 시공간을 지배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눈앞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체념하는 쪽이 현명할까, 아니면 현실을 저주하며 울부짖기라도 해야 할까?

이 소설 《이스탄불 이스탄불》의 남자들은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피항할 섬을 해도에서 지워버린 채 앞으로 앞으로 돌진하는 항해사처럼, 무아 상태의 시인처럼 펼쳐놓는 네 남자의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에 나는 지난 2년을 꼼짝없이 사로잡혔다.

보스포루스 해협이 휘감아 돌며 첨탑과 돔들이 아찔한 스카이라인을 이루는 오래된 도시 이스탄불. 잔인하리만큼 매혹적인 이 도시 아래, 죽은 자들의 묘지보다 깊고 음습한 지하감옥으로 직업도 성향도 나이도 전혀 다른 네 남자가 던져졌다.

열아홉 살 대학생 데미르타이는 단지 가난한 엄마가 밤마다 눈물 흘리지 않아도 되는 일상을 꿈꿨다. 그런 세상을 만들겠다고 혁명운동에 가담했다가 여기까지 왔다. 군인들에게 곤죽이 되도록 맞은 후 죽은 개처럼 널브러져 이 감방에 처박힌 그를 살려낸 건 의사 아저씨라고 불리는 중년 남자였다. 뭇 생명에 대해 한없는 동정과 사랑을 지닌 이 사내는 병든 세상을 고치겠다며 혁명단체에 들어갔던 의대생 아들이 폐결핵 환자가 되어 나타나자 자신이 일하는 병원에 다른 이의 이름으로 아들을 입원시킨 뒤, 그 아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대신하다 경찰에 잡혔다. 그리고

시를 쓰는 이발사 카모. 고통만이 생의 유일한 스승이었던 그는 여기서도 철저히 외로운 이방인으로 남기를 원했다. 

어느 날, 가로 1미터 세로 2미터 감방으로 퀴헤일란이라 불리는 피투성이 노인이 들어왔다. 의사의 극진한 간호로 의식을 찾은 노인은 피로 엉킨 눈꺼풀을 천천히 올리며 물었다. “여기가 이스탄불인가?” 행복감으로 충만한, 이상스런 눈빛이었다. 멀고 먼 마을에서 평생토록 이스탄불을 그리워만 하다 생의 끄트머리에 이 도시 지하감옥으로 온 그는 열망에 달뜬 청년처럼 이스탄불을 찬미했다.

현실과 상상이 분리되지 않는 퀴헤일란의 격정에 이끌린 세 사람은 머잖아 다시 찾아올 고문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삶에서 가치 있는 일은 오직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것뿐이라는 듯 이야기의 향연에 빠져들었다. 흰고래를 찾아 평생 먼바다를 떠돌다 패배한 늙은 어부, 해도(海圖) 위에 가상의 섬을 그린 후 자신이 사랑한 여인의 이름을 지어주는 해도 담당 선원, 기발한 수완으로 강간을 모면하는 수녀, 벽의 거짓말에 속는 외딴마을 사람들…. 그렇게 각자 경험하고 들은 온갖 이야기를 변주하며 시시각각 부옇게 멀어지는 땅 위의 삶, 끊어질 듯 가느다란 희망에 매달렸다.

여기에 에피소드 사이를 메우는 네 남자의 사적인 내러티브가 더해지면서 땅 아래와 땅 위, 이야기 안과 이야기 바깥, 서로 다른 시공간이 얽히고설켜 빚어내는 서사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태피스트리로 완성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빚어낸 환상동화 같은 이야기들이 땅 위 도시인의 우화가 되어 지금 여기의 삶을 반추하는 거울이자 철학적 질문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얼핏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 떠오르는 이 작품을 나는 다섯 번 읽었다. 그 사이 거부할 수 없는 충동에 휩싸여 봄과 가을, 두 차례 이스탄불을 다녀왔다. 그들이 말하는 이스탄불의 안과 밖을, 갈라타 광장을,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냄새를 내 눈과 귀와 코로 확인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서였다.

흑사병이 창궐하던 시기 《데카메론》의 귀족들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냄새를 피해 시골 별장으로 은신했다. 반면 이 소설 속 네 남자는 병든 세상에 뛰어든 대가로 지하세계에 갇혔다. 자발적 격리와 강제 격리, 삶 쪽에 가까워진 현실과 죽음에 바짝 다가선 운명. 이 극명한 차이에도 갇힌 그들이 불멸의 묘약으로 삼은 이야기의 힘은, 그 이야기가 다시 독자를 위무하는 힘은 대체 어디서 기원하는가? 

터키 쿠르드인 마을에서 자란 쇤메즈는 이스탄불에서 법대를 졸업한 뒤 인권변호사이자 저술가로 활동하다 정치적인 이유로 구금돼 고문을 당했다. 이후 케임브리지로 망명해 그곳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고 소설을 쓰면서 심신의 상처를 회복했다.

그의 체험이 투영되었을 이 소설은 그럼에도 시종일관 경쾌한 문장으로 우리가 놓치고 사는 생의 다양한 이면을 그려낸다. “도시는 경제 교환 장소 이전에 말과 욕망과 기억의 교환 장소이다.” 이탈로 칼비노의 말이다. 고전적인 플롯과 구전설화의 서사를 차용해 현대인의 꿈과 욕망, 기억과 상실을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갇힌 일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건너는 한국 독자들에게는 또 어떤 울림으로 다가올까?

필자=지평님. 도서출판 황소자리 대표  
필자=지평님 도서출판 황소자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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