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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학단협 연합심포지움 '우리학문 속의 미국'
리뷰: 학단협 연합심포지움 '우리학문 속의 미국'
  • 홍성민 동아대
  • 승인 2003.11.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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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대외의존성, 좀더 내밀한 분석 필요하다

7년간의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나는 허망감에 빠졌다.

영어로 강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대학의 구직자리에서 밀려나야 했던 쓰라린 기억이 있고, 힘겹게 전임자리를 찾았을 때는 SSCI급 잡지에 영어 논문을 내지 못하면 연구비가 제한된다는 기가 막힌 얘기를 듣기도 했다.

한국학문에 초석이 될만한 저작을 쓰기 위해서 장기적인 안목으로 연구계획을 세우겠다는 포부는 매년 연구비 혜택을 받고 있는 주변 교수들의 눈총에 값싸고 쓸모없는 사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가장 진보적이며 선구적이라고 기대했던 대학과 지식인사회가 어쩌면 가장 기회주의적인 장소로 타락해 버린 것은 아닌가라는 자조 속에서, 나는 지난 몇 년간 한국학문의 미국종속성을 비판하는 몇 편의 글을 쓴 일이 있었지만, 학계에서 내 글에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인 것 같지는 않았다.

대학과 지식인 사회, 기회주의적 장소인가?

그러던 차에 학술단체 협의회에서 한국학문의 미국종속성에 대해 진지하게 비판하고 우리학문의 나아갈 향배를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몸이 멀리 있어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발표문들을 구해 읽어보면서 학문에 대한 열정과 진지함을 잃지 않고 있는 학자들이 아직도 이 땅에 많이 남아 있다는 생각에 지난 몇 년간 참아야 했던 나의 좌절과 고독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제1부 '한국의 지식인 사회 형성과 미국'에서는 김정인 박사의 '해방 이후 미국식 대학모델의 이식과 학문 종속'이 꼼꼼한 실증분석이 돋보였고, 사회과학, 문화와 여성, 교육학, 철학 등 4개 분야로 나눠 미국편향성의 현황을 짚은 2부에서도 눈길을 끄는 논문이 많았다. 전반적으로 이론적 성찰보다는 실제적 자료 조사를 해서 논의의 토대를 만든다는 느낌이 강했다. 특히 정치학자로서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정영태 박사가 발표한 "한국정치학의 미국편향성과 한국정치"라는 논문인데, 여기서 정 박사는 미국정치학의 이론들이 어떻게 한국의 지식시장을 장악해 왔으며, 또 어떻게 친미적인 지식인들이 재생산됐는가를 정교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이번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논문에 대해 한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발표문의 대부분이 한국학문의 미국종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미국유학파들의 국내대학 점유율이나 학회지의 분포도를 분석하고 있는데, 한국 학문의 식민지성을 좀더 철저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반인들이 한국정치에 대하여 갖고 있는 정치적 가치관과 표상의 문제를 학문의 시장논리와 연계해 연구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싶다.

다시 말해 학문의 장 안에서 학자들 간에 전개되는 계급투쟁의 양상만을 포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우리 학문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밝혀내기 위해서는 미국정치학의 이론구조를 통해서 미국식 가치관이 일반대중들에게는 어떤 식으로 유포되며, 그리하여 우리 사회에서 첨예한 쟁점으로 등장하고 있는 정치적 사안들에 대해 미국의 상징적 권력이 어떻게 한국사회의 여론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1세기 전 조선이 서양의 대포와 전함 앞에 무릎을 꿇고 굴종했다면, 이제 우리는 미국대학의 브랜드 가치와 영어논문이라는 상징 자원 앞에서 우리의 문제의식과 학문적 가치관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학계, 지식이전 문제 대처방안 마련해야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한국학문이 미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학자들을 계몽하는 차원에 멈추어서는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 군사분야에서 무기이전이나, 경제분야에서 투기적 자본의 침투, 그리고 문화산업분야에서 스크린 쿼터문제들을 두고 시민단체들이 미국의 횡포에 대하여 항거하고 투쟁하듯이, 이제는 학계에서도 지식이전의 문제를 심각하게  공감하고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연대해 대처방안을 마련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신정완 교수가 발표한 '주체적 학자양성의 필요성과 방안'에 나타난 제안처럼 국내박사할당제를 도입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 입법화하는 것은 어떨까. 또는 특정 지역연구를 수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해당지역의 언어와 생활을 체득한 사람으로 한정하는 방법도 미국식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한국학문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불어나 독일어 한줄도 제대로 못 읽는 사람이 유럽전문가로 통하는 우리 사회현실이 나에게는 신기할 따름이다. 허기야 손쉬운 일부터 하자면 그 잘난 SSCI급인지 뭔지를 폐지하고, 한국정치를 영어로 강의하는 코미디를 대학사회에서 철폐해야 할 것이다.

홍성민 / 동아대·정치학

필자는 파리5대학에서 '아비투스, 육체, 지배 : 부르디외 사회학의 철학적 전제들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동안 '한국정치학의 정체성과 탈식민주의', '우리언어의 정체성과 탈식민주의', '한국정치학의 정체성과 학자들의 아비투스' 등의 논문을 통해 학문의 미국화를 비판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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