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09:55 (목)
학계의 '탈미국' 동향
학계의 '탈미국' 동향
  • 이지영 기자
  • 승인 2003.11.2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생 학문 논의 속 '知美 ' 연구 기지개

국내 학계의 자생성 논의는 언제나 '뜨거운 감자'로 남아있다. 굴곡 어린 한국 근대사의 흐름 속에서 학문의 자생성에 관한 논의는 뜨거워졌다가 사그라지는 과정을 반복해 왔다. 해방과 한국전쟁 직후에 나왔다가 사라진 논의를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1975년에 이미 문승익 중앙대 교수가 정치학의 미국 종속성을 비판하고 "자아준거적 정치학 연구"를 주장하기 시작했으니 그 기원은 한참을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 후반 학번부터 1980년대 초반에 국내에서 사회과학을 연구하던 신진 학자들은 유학을 포기하고 '한국적 사회과학'에 몸을 던지기도 했다. 또 다시 1990년대 중반,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 김영민 한일장신대 교수의 '탈식민 글쓰기'는 학계의 관심을 불러모았다.

학계의 자생성 확보의 최대 화두는 '탈미국화'로 집약된다. 정확히 함의하고 있는 뜻은 서로 다르지만 그 범주는 많이 겹쳐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최근에는 '탈미국'의 방식으로 학계의 자생성을 논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배경을 찾아볼 수 있다. 80년대 후반의 학술운동을 주도했던 대학원생들이 소장학자로 성장해 사회의 개혁 주도 계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과 9·11 이후 미국의 패권 장악으로 인해 오히려 이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것이다. 내적인 요구와 외부적인 억압이 맥을 같이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흐름 속에 학문의 자생성, 또는 탈미국화 논의는 특성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학계 전반의 공유된 문제의식으로 성장했다.

올해 초 이라크전에 대해 학계에서는 유례없던 '절대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점차 반전은 반미에 대한 논의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생각하는 한국인을 위한 반미교과서'(당대 刊) 등이 이 시기에 나온 책이다. 비록 논쟁의 대상이 되고 말았지만, 현 정권의 출범에 맞춰 네델란드의 경제 모델 수용이 논의되기고 했다. 경제분야의 미국 이론 점유가 유난히 심한 것을 고려해 보면, 현실 경제에서도 '탈미국'의 요구가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학단협이 '우리 학문 속의 미국'을 주제로 개최한 학술대회는 사회적인 흐름을 타고, 학계의 반성과 성찰을 총망라한 자리라고 할 수 있다. 학단협은 이 주제로 내년 학술운동의 과제로 제시할 계획이다. 역사문제연구소 역시 '한국사회의 脫아메리카: 가능성과 현실'을 장기주제로 매달 열리는 토론마당을 운영하고 있다. 반미, 반전을 주제로 했던 각종 토론회에서 한발 더 나아가 우리의 의식 속에 자리잡은 미국적인 사고에 대한 성찰과 반성, 대안을 모색하는 보다 근본적인 접근을 시도하겠다는 의도다.

살림지식총서가 10권의 미국연구서를 펴낸 것도 미국에 대한 철저한 해부와 분석을 하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날로 강해지는 미국의 영항력에 비해, 정작 제대로 분석을 해 낼 수 있는 연구자는 부족하다는 현실 진단에서다. 눈여겨볼 것은, 국내 필진들을 전격 유치함으로서, 지식수입국이 아니라 지식의 자생력을 키우겠다는 것이다. 친미와 반미, 용미와 비미 등의 논의를 떠나서 우리의 관점으로 미국을 제대로 보자는 시도인 셈.

직접적인 '탈미국'으로는 볼 수 없지만, 학계에서 동아시아 연구자들과의 직접적인 연계를 모색하는 것도 미국-한국간의 학문적 종속 관계를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아시아 연구서가 대거 출판된 이후에, 연구자들간의 직접적인 연대를 만들기 위한 초석을 놓기 위한 준비가 한창인 것이다. 다음달에 열릴 한국사회학회의 정기학술대회에 동아시아 연구자들이 참석하기로 한 것이나, 내년에 열린 '동아시아 과학기술학의 탐색' 역시 같은 맥락에 서 있다.
김영명 한림대 교수(정치학)는 "지난 30년 동안 우리는 독창적인 학문을 일궈내야 한다는 것을 결론으로 내려왔다"라며 "실천적인 방향 모색을 출발점으로 논의를 시작할 때다"라고 지적했다. '탈미국'의 요구가 높아지는 가운데, 학계에서는 어떤 대안을 내놓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지영 기자 jiyoung@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