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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58)] 고속버스터미널이 아닌 고속버스원
[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58)] 고속버스터미널이 아닌 고속버스원
  • 교수신문
  • 승인 2020.05.1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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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션과 터미널

마음속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여행을 가려면 스테이션과 터미널을 들려야 하니 그것과 관련된 기억을 떠올려본다. 

외국어 교육의 한계라기보다는 내 공부와 인지의 편협함이겠지만, 나는 스테이션(station)은 기차역만 가리키는 줄 알았다. 중학교 수준의 실력에서 어쩔 수 없었다. 스테이션은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어디가 역이죠?’라고 할 때의 기차역(railway station)이어야 했다. 

스페인의 작은 마을에서 기차를 타기 위해 스테이션을 물었는데 내려서 걸어올 때는 분명히 가까웠는데 자꾸 멀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물을수록 자꾸 멀어지고 있었다. 막상 도착한 데는 버스 스테이션이지 기차 스테이션이 아니었다. 

우리는 버스 스테이션을 터미널이라고 부른다. 그런 인식의 편협함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에 내리니 중앙역을 테르미니(termini)라고 불렀다. 라틴어에서 테르미누스가 단수이고 테르미니가 복수인 것은 알지만, 그것이 모든 기차의 종착지였던 것은 몰랐다. 

터미널의 원의를 안 것은 컴퓨터의 터미널과 영화 터미네이터 때문이었다. 요즘은 우리의 공항도 제1터미널, 제2터미널을 구분하니 터미널이 버스의 목적지만이 아님은 쉽게 알 것이다. 공항이면 김포공항이나 김해공항처럼 하나만 떡하고 있는 줄만 알았던 수 십 년 전, 런던의 히드로(Heathro) 공항에서 서울로 오는 제4터미널에서 밤새 고생한 것도 잊히지 않는다. 

이런 편견이나 관습은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언어생활을 지배한다. 우리말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영향이겠지만 우리는 기차역만 역(驛)이라고 한다. 분명히 말 마(馬) 자가 들어가는 데도 말이다. 역은 말을 바꿔 타는 곳이었다. 말죽거리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마을처럼 제대로 형성되어 있으면 원(院)이라고 불렀다. 말만 바꾸면 역이고, 잠도 잘 수 있으면 원인 것이다. 공립이 아닌 사립 마방(馬房)도 있었다. 

따라서 ‘시외버스역’도 되고 ‘고속버스원’도 되어야 하는데, 버스에는 역과 원을 붙이지 않는 요상함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서울고속버스원은 말 그대로 특급호텔도 함께 붙어있어 확실한 원인데 말이다. 조치원이나 퇴계원이라는 이름만 남아있지 이제 우리는 원이란 말의 역사와 전통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더 웃기는 것은 ‘조치원역’이라는 말이다. 원과 역을 촌스럽게 함께 붙여 쓰니 말이다. 오늘날 표현으로 바꾸면 ‘조치 잠자리와 말 갈아타는 곳’이 ‘조치 호텔 레일웨이 스테이션’이 된 것이다. 영어로 써보자. ‘JOCHI Hotel & Railway Station’ 또한 영등포역은 근처에 호텔도 있으니 영등포원이 좋을 것 같다. ‘YEONGDEUNG Port, Hotel & Station’이다. 그런데 항구의 기능이 빠졌으니 정확한 어의상으로는 ‘영등원’ 정도가 된다. 

중국은 원보다는 참(站)을 썼다. 참은 유교, 불교, 도교 등 여행의 안녕을 비는 종교시설을 비롯해 자족적 도시 기능을 가진 곳이었다. 우리말에서는 군대의 병참(兵站)이라는 말에 남아있다. 병참기지는 보급, 정비, 교통, 건설, 보건을 담당한다. 나는 북경 서남쪽에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참에서 하룻밤을 머문 적이 있는데, 작은 성곽 속의 아담한 마을이었다. 역참(驛站)의 전통 아래, 그래서 중국은 북경역을 북경참(北京站; 베이징짠)이라고 부른다. 

스테이션은 정거장의 뜻으로 경찰, 소방서, 방송국, 주유소, 관측소, 주둔지, 정박지에 이어 컴퓨터 네트워크의 중심을 모두 가리키는 매우 폭넓은 말이었는데, 나는 그것을 단지 기차역으로 알았으니 참으로 한심했다. 더 놀라운 것은 역 앞에서도 그것이 그냥 집 같아서 역인 줄도 모르고 지나쳤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역이야 요상하게 짓지만 그들은 그냥 집 모양일 수밖에 없었던 것을 몰랐던 것이다.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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