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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의 『편지』 ―어느 노동자 화가가 꿈꾼 세상(5)
빈센트 반 고흐의 『편지』 ―어느 노동자 화가가 꿈꾼 세상(5)
  • 교수신문
  • 승인 2020.05.07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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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학교 박홍규 명예교수(좌)와 최재목 교수(우)
영남대학교 박홍규 명예교수(좌)와 최재목 교수(우)

<4편에 이어>
 

: <감자먹는 사람>은 빈센트가 서른세 살에 그린 거죠?
: <감자먹는 사람>. 그야말로 초기의 이 그림을 자신은 분명히 자기의 최고의 걸작이라고 생각했어요. 보시는 바와 같이 농촌의 가난한 사람들의 식탁을 그렸는데요. 이 그림의 의도는 그의 편지에서 알 수 있어요.
: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이 그림에서 강력하게 의도한 점은, 램프 밑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이 사람들이, 지금 접시 속의 감자를 찔러서 먹고 있는 그 손으로, 대지를 팠다고 하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어.”(1885년 4월 30일경, 편지 401) 이 대목을 보니까 빈센트가 사물을 보는 깊이 있는 사유에 들어서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예. 그렇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

: 그 다음엔 태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자, 이제 본격적인 우리가 아는 빈센트의 그림을, 빈센트의 젊은 시절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젊은 시절의 어두운 그림을 주로 보여드린 이유는, 그의 그런 삶과 그림을 알아야지 태양이 등장하는 그야말로 가장 찬란한 시절의 그림, 그 어떤 빛, 빛나는 그림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1888년, 이때 빈센트는 아를에 도착하죠? 파리에서 좀 있다가, 동생 테오랑 둘이. 왜 그랬죠?
: 예 지옥 같은 생활을 보내다가. 그러니까 편지로는 그렇게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형제애를 과시하던 형제인데 만나면 지옥처럼 막 싸우는 거에요. 그렇게 2년 동안 파리에서 형제가 싸우다가, 뭐 그런 것도 있지만, 도시생활이 너무 싫었던 거에요. 빈센트는는 그래서 시골 아를로 갑니다. 파리의 생활비도 비싸고 도시생활도 번잡스럽고 또 인상파를 빈센트는 좋아하지 않았고. 아를은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 지방에 가장 그 태양이 찬란한, 로마시대 때부터 유명한 동네입니다. 아를은 생활비도 싸고, 또 거기서 예술가 공동체를 구상했었죠. 사실 빈센트는 어릴 때부터 가족에 대한 갈망 같은 게 있었어요. 이것을 끊임없이 화가 공동체를 통해서, 유토피아 같은 걸 만들어내려고 꾸준히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이 아를에 자기가 먼저가서 다른 젊은 화가들을 많이 불러 모아서 예술가들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꾸며보자는 것. 같이 밥도 해먹고, 그림도 그리고, 우정도 나누면서, 한번 이상향을 만들어보자, 뭐 이런 생각으로 아를에 갔던 거죠.
: 그래서 88년에 5월에 노란 집을 빌리고, 8월엔 해바라기 그림을 그리고, 9월에는 밤의 카페 등등의 그림도 그리고. 이때 고갱을 만난 것이 10월경이죠?
: 네. 10월에 고갱을 만나고.
: 한 2개월쯤 살다 헤어지죠?
: 예. 한 2개월 만에 
: 나중에 귀도 자르고. 근데 이게 1887년이죠? 탕기 영감의 초상화를 그리고, 이 당시 일본 판화에 매료됐지 않았습니까? 그게 당시 유행했었죠?
: 예. 그렇습니다.
: 일본의 우키요에라든가 자포니즘(일본주의)라는 것. 
: 예.
: 일본에 가면 그 당시에 동양 쪽으로는 황금도 있고 여성도 있고, 그런 동양 취미라는 게 있었죠?
: 꼭 일본사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닌데, 동양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뛰어나다는 생각. 또한 당시 종교적으로도 빈센트가 불교에도 심취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불교가 그 당시 19세기 후반의 물질적으로 타락한 기독교를 대신할 수 있는 참된 종교가 아니겠냐는 생각을 했었던 거죠.
 
: 반 고흐가 남긴 여러 자화상 가운데 스님 자화상이 하나 있지요? 머리를 빡빡 밀어버린.
: 예! 스님 자화상.
: 스님이 되고 싶었던 건가요? 아니면 일본 스님을 보고 이렇게 그린 것입니까?
: 자기도 이제, 동양의 스님처럼 순수한 종교적인 삶을 살아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린 그림입니다.
: 제가 찾아보니까 빈센트의 경우 한 20여점 이상의 자화상이 있던데요.
: 그렇습니다. 한 2~30여점 넘죠. 
: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 아주 피상적으로 말하면, 모델료를 낼 수 없어서 사람의 얼굴을 그리기가 힘들었다는 것이죠. 아울러 그 얼굴 표정이나 얼굴을 통해서 나름의 인생 공부, 인간 공부를 한 것이죠.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자화상이란 자기탐구의 한 중요한 소재였습니다. 또 자화상을 그리면서 골상학 공부도 한 것입니다. 
: 인물화에 대해서 고흐가 상당히 좀 가치를 두는 그런 건가요?
: 이 여러 자화상을 시간이 없어서 하나하나 설명을 못하지만, 사실 이 그림을 그릴 때 마다 사연과 곡절이 다 있어요. 그러니 상황 상황마다 하나하나가 굉장한 인생살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 그 다음에 조금 더 가겠습니다. 네. 귀를 자른 후 그린 자화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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