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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매체 전환의 시대 - 구본신참(舊本新參)의 독법(讀法)이 필요한 때
[학문후속세대의 시선]매체 전환의 시대 - 구본신참(舊本新參)의 독법(讀法)이 필요한 때
  • 교수신문
  • 승인 2020.05.11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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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가에 등록금 투쟁이 부활했다. 코로나 정국에서 진행되는 온라인 강의에 만족할 수 없으니 등록금 일부를 반환하라는 논리이다. 학생 못지않게 강의자의 불만도 높다. 수업 준비가 더 어려워졌을 뿐 아니라, 컴퓨터 화면을 보고 강의하는 시간이 여간 싱겁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온라인 강의의 질적 수준이 오프라인 강의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데도 이러한 불만이 제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지식 정보가 단순히 텍스트의 정보 전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적 감각과 결합되는 감각적 대상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프랑스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는 ‘역사 연구는 골동품 애호에서 시작하였다.’고 말하였다. 물건에게서 느끼는 감각적 애호에서부터 지적 동기가 촉발되었다는 말이다. 현대의 인문학자들에게도 먼지 쌓인 장서들로 둘러싸인 공간은 골동품 못지않은 감각적 애호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두툼한 책의 무게감, 낡은 종이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펜촉의 필기감, 노트에 붙여진 쪽지의 위치 등 여러 가지 감각들은 연구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이러한 시공간적 감각들이 연구의 동기가 될 뿐만 아니라, 연구 성과를 기억하고 활용하는 데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도구는 점차 전자매체로 수렴되는 추세이다. 학술 논문의 첫 장에는 인터넷 하이퍼링크인 DOI가 수록되고, 학술논문집의 인쇄본 발간은 점차 축소되고 있다. 이제 텍스트들의 주된 유통경로는 출판 시장이 아니라 온라인 사이트가 되었다. 구전이 인쇄물에게 왕좌를 내어주었듯 인쇄물은 전자매체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 주고 있다. 인쇄물에 비해 전자매체가 갖는 장점은 뚜렷하다. 필요한 정보를 검색하여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공간 제약을 넘어 정보를 무제한에 가깝게 축적할 수 있다. 노트북 1대를 가지고 수 천 권의 책과 논문을 대신할 수 있고, 책꽂이로 가득 찬 연구실 대신 스타벅스의 창가 자리에서 연구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전자매체의 확산이 학문 연구에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할까? 적어도 텍스트 이해라는 기본적 기능에서 전자매체가 인쇄물보다 우월한지에 대해 의문이 든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저자 니콜라스 카는 전자매체를 통한 텍스트 읽기의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겉핥기식 읽기, 산만한 생각, 피상적인 학습을 넘나드는 ‘곡예하는 뇌’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뇌가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지 않고 곡예하는 이유는 전자매체의 특성이 하이퍼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전자매체에서는 한 화면의 정보로부터 다른 화면의 정보로 변환되는 과정이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이러한 과정이 사람들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고 기억력을 감퇴시킨다는 논리이다.

더욱이 전자 매체는 읽은 내용을 기억하는 데 불리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인쇄물로 글을 읽을 때는 해당 정보가 어느 페이지,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 공간적 감각과 결합하여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전자매체에서는 고정된 스크린 안에서 텍스트들이 미끄러져 흘러나간다. 이 때문에 전자매체를 통해 글을 읽으면 어떤 정보가 어느 페이지,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 공간적 감각으로 기억해내기 어렵다. 이처럼 전자매체가 가진 편리함 뒤에는 숨겨진 독성이 존재한다.

현재는 매체의 축이 인쇄물에서 전자매체로 바뀌는 전환기이다. 오로지 인쇄물만을 활용하면서 전자매체의 유용성을 도외시하는 태도는 현대판 위정척사파이고, 전자매체의 광휘에 현혹되어 인쇄물의 가치를 도외시하는 태도는 현대판 급진개화파일 것이다. 각 매체가 가진 장단점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적응하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독법(讀法)이 필요한 때이다.

 

 

 

 

 

 

 

 

정진혁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조선시기 사회사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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