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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향평준화 주장, 사실과 다르다"…사교육비 팽창, 평준화 정책과 무관
"하향평준화 주장, 사실과 다르다"…사교육비 팽창, 평준화 정책과 무관
  • 이민선 기자
  • 승인 2003.11.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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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분석: 평준화 폐지 논란, 무엇이 문제인가
 

최근 김진표 재정경제부 장관부터 시작해 이명박 서울시장까지 교육문제가 부동산 투기의 진원지라는 식의 사견을 거침없이 토해내고 있다. 이에 조선․중앙․동아일보는 이들 주장을 기폭제로 삼아, 부정확 자료와 근거를 제시하며 고교 평준화 폐지를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언론들의 주장을 수용하기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많다. 일부 교육학자들은 메이저 언론이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평준화 폐지를 주장하고 있는 언론의 논리와 근거는 무엇인지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지 우선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90점짜리와 40점짜리를 한데 모아 가르치는 교실에선 잠을 잘 수밖에 없다. 공교육이 무너지니 사교육이 극성이고, 미쳐 날뛰는 강남 집값은 계층간 틈까지 벌려 놓고 있다.” (조선일보, 2003.10.11 사설 ‘교육자율화해야 강남 집값도 잡힌다’ 중에서)

 

조선․중앙․동아일보의 고교 평준화 폐지에 대한 ‘공세’가 날이 갈수록 거세다. 최근 재정경제부 장관․한국은행 총재․서울시장 등이 자립형사립고와 특목고 설립 필요성을 언급하자, 이들 언론이 열을 올리며 평준화 폐지론을 설파하고 있다.

 

폐지 논리는 단순 명쾌하다. 고교 평준화→교육의 하향 평준화→사교육 팽창→부동산 투기 과열로 이어진다는 게 핵심 논리다. 현재 난마처럼 얽힌 다양한 문제들의 핵심에 ‘고교 평준화’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과연 모든 문제의 진원지가 ‘평준화’로 압축될 수 있는 것인가 곰곰이 따져 볼 일이다. 얼핏 일리 있어 보이는 이 논리 속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는 구석이 곳곳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교육의 하향평준화?

 

“무엇보다 30년간 하향평준화로 이어져 온 교육제도가 경쟁력 있는 인재를 기르는 데 적합한지 따져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동아일보, 2003.10.11 사설 ‘교육제도 논의 제대로 할 때다’ 중에서)

 

3개 언론이 평준화의 가장 큰 폐해로 지적하는 것이 교육의 ‘하향’ 평준화다. 이미 지적능력이 뛰어난 학생과 수업내용조차 알아들을 수 없는 학생이 공존하는 현재의 교육시스템으로는 교육경쟁력 확보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는 게 주장의 요체다.

 

지난 달 23일 조선일보는 ‘상위권 학생들 학력추락 더 심하다’는 기사에서, 올해 서울대가 신입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텝스와 수학 시험에서 각각 27%, 13.7%의 학생이 낙제했다고 보도하고, 평준화의 폐해를 지적했다. 또 2000년 경제협력개발기구가 조사한 ‘국제학업성취도평가’ 결과를 제시하며, 상위권 학생들의 학력이 저하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평가에 따르면 32개국 중 한국은 과학 1위, 수학 2위, 읽기 6위로 아주 높은 순위를 차지했지만, 상위 5% 우수생들만 비교하면 읽기의 경우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653)점보다 낮은 629점인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러한 근거들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성기선 가톨릭대 교수(교육학과)는 “서울대의 텝스와 수학 시험 결과는 평준화와 비평준화 고교 간 비교를 하지 않은 채 발표된 것이다”라고 꼬집고, 시험 결과를 평준화 폐해로 몰아가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최근 일선 고교에서 평가 시스템이 무너진 것이나, 교과 수준의 문제로 봐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성 교수는 오히려 평준화가 학생들의 학업성취를 높이고 있다고 말한다. 상위 10% 이내 학생은 평준화에 관계없이 일정한 학업성취를 보였지만, 중하위권 학생의 경우에는 오히려 평준화 지역 학생이 더 월등한 학업성취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는 성 교수가 1997년 전국 522개교 11만 명 학생들의 모의수능시험 결과를 토대로 평준화와 비평준화 학생들의 점수를 비교한 결과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 결과의 경우에는 평준화 폐지를 염두하고 선택적으로 해석한 혐의를 벗어날 수 없다. 평가결과 분석을 담당했던 채선희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연구원은 “이번 결과는 한국이 학력이 굉장히 떨어지는 학생도 적고, 굉장히 우수한 학생도 적다는 의미다”라며 신중하게 해석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 본부에서는 한국을 교육의 수월성과 형평성을 확보한 모범적인 사례로 꼽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렇다면 상위권 학생들의 하향평준화만을 언급해 섣부르게 평준화 폐지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평준화의 장점을 살리면서 상위권 학생들의 경쟁력 살리기를 고민해야 할 일이다. 채 연구원은 “학생들의 능력에 따라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는 7차 교육과정이 교사들의 수준확보와 교실수 부족같은 문제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있지만, 이것만 해결된다면 평준화를 유지하면서도 경쟁력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하향평준화가 사교육 팽창 유발?

 

"학부모의 교육열은 나날이 높아지는데 학교가 제 구실을 못하니 공부는 학원과 과외에 맡겨졌다. 그 결과 과외비 규모가 매년 조 단위로 늘어 OECD 1위의 사교육비 지출국이 됐고…“ (중앙일보, 2003 .10. 28 중앙포럼‘劉仁鍾 교육감의 고집’ 중에서)

 

평준화에 대한 또 하나의 오해는 사교육을 팽창시켰다는 논리다. 상위권 학생들은 학교 교육의 수준이 맞지 않아서, 하위권 학생은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서 사교육에 의존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평준화 고교에 다니는 남매를 두고 있는 박 아무개 씨는 생활비 2백만 원 중 1백50만원을 사교육비로 지출한다. 박 씨가 사교육비를 아낌없이 쓰는 이유는 단 하나다. 하나라도 더 배우면 남매가 좋은 수능 점수를 얻어 ‘명문대’에 입학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장 아무개 씨도 마찬가지다. 비평준화 고교에 다니는 아들을 두고 있는 장 씨는 한 달에 과외와 학원비로 80만원 정도 지불하고 있다. 그 학교가 소위 높은 명문대 진학률을 보일 정도로 ‘교육의 질’을 담보하고 있지만, 남들 다하는 과외를 하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일부 사례이긴 하지만 평준화든 비평준화든 사교육비 팽창을 늘리는 건 마찬가지라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교육비 팽창 혐의를 평준화 시스템에 두는 건 옳지 않다.

 

이와 관련해 지난 6월 박부권 동국대 교수는 ‘고교 평준화 정책의 진단과 보완방안에 관한 연구’에서 의미있는 내용의 발표를 했다. 박 교수는 “사교육비 부담이 증가가 대학입시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장기적인 목표와 이윤추구논리에 바탕한 사교육시장의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봐야 타당하다”라고 주장했다.

 

▶질좋은 사교육 시장, 그로 인한 부동산 투기?

 

“심각한 사회 현안인 서울 강남지역 아파트값 폭등의 주요한 요인은 교육문제다…강남에는 상위권 대학에 많은 학생들 입학시키는 고교가 몰려 있고, 수능시험의 점수를 올려주는 유수한 학원들이 밀집해 있다”(중앙일보, 2003. 10 .10 사설 ‘평준화 교육정책 빨리 포기해야’ 중에서)

 

지난 9월 김진표 재정경제부 장관의 언급을 필두로 다수의 관료들은 강남의 부동산값 폭등 해결이 강북 개발에 있고 그 핵심은 자립형사립고와 특목고 설립에 있다고 주장했다. 질좋은 사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장점 때문에 강남 부동산값이 치솟는다면, 그에 대응하는 교육 프리미엄을 강북에 만들어 부동산값을 막겠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이종구 성공회대 교수(사회과학부)는 “박정희 정권 시절 장발과 미니스커트가 미풍양속을 저해한다는 논리와 마찬가지”라고 힐난했다. 교육여건이 좋기 때문에 강남 일대 땅값이 오른다는 것은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 이 교수는 “IMF 이후 한국 사회가 소득분배가 악화돼, 갈 곳 없는 뭉칫돈이 땅값을 올리는 주 요인이 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지난 달 20일 한국개발연구원이 발표한 내용도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저금리 시대 부동산 가격과 통화․조세 정책 시사점’이라는 보고서는 강남지역의 경우 전세 가격은 별 변동없이 지난해 하반기 이후 매매가만 오르고 있다며 교육이 집값 폭등의 이유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대안은 자립형 사립고․평준화 폐지!?

 

조선․중앙․동아일보의 주장의 끄트머리에는 자립형 사립고 설립, 나아가서는 평준화 폐지가 있다. 공립학교는 평준화 체제 유지, 사립학교는 교육자율화를 주장하고 있지만, 자립형 사립고 설립이 기존 평준화 체제를 무력하게 만든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들 언론이 원하는 건 궁극적으로 평준화 폐지다.

 

그러나 자립형 사립고 설립과 평준화 폐지가 답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성기선 교수는 “이들 언론의 이야기가 일부 맞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라고 말한다. 성 교수에 따르면 현재 전국 고교가 사립학교와 공립학교가 절반씩이고, 이중 90% 이상의 사립학교가 재정이 열악함을 고려할 때, 자립형 사립고를 할 수 있는 학교가 손에 꼽을 정도라는 것. 섣부른 평준화 폐지가 공교육을 오히려 망치는 수가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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