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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의시간-나의 항해, 우리의 항해
나의 강의시간-나의 항해, 우리의 항해
  • 김성조 한국외대
  • 승인 2003.11.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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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조 한국외국어대 서반아어 ©
매 학기 첫 수업, 강의실에 들어설 때마다 나는 수업이라 이름한 큰 배의 선장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앞으로 한 학기 동안 혹은 일 년 동안 어떻게 이 배를 운영해서 목적지에 무사히 다다르게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긴장도 되지만 새로운 선원들인 학생들과 만나는 기쁨에 들뜨기도 한다. 자원해서 내 배에 승선한 선원들은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가득차 있고 많은 기대 속에 맑은 눈빛으로 나의 입술을 통해 나올 말들을 주시하고 있다. 이 말들이 그들에게는 항해를 함께 할 지 아니면 바로 하선하여 다음주부터는 서로 볼 일이 없게 될 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 나는 비로소 입을 열고 우리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대해 설명을 시작한다. 우리가 갈 목적지는 어떤 곳인지 그리고 그 곳에 다다르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과 방법 그리고 지켜야 할 규칙 등을 설명한다. 한 주에 2-3시간, 한 학기 통틀어서 30-50시간의 항해를 위해 최적의 속도와 방향을 설정하고 실제 적용 방안들을 설명한다. 선원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선원들이 지켜야 할 규칙도 많고 중간시험과 기말시험이라는 기본적인 걱정에 과제물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그 뿐인가, 짝짓기 수업(pair work)을 위해 줄 맞춰서 자리에 앉아야 한다. 그리고 스페인어 노래 자랑 대회를 한다는데 이건 또 어떻게 할지. 취업이나 진학을 생각한다면 학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자신이 과연 이 수업에서 좋은 학점을 받을 수 있을지. 선원들은 어쨌든 다음 주까지는 결정해야 할 것이다.

 

학생들이 한 마디라도 스페인어를 더 말하도록 하기 위해 짝을 지워서 연습을 시킨다. 그 날 배운 내용을 대화문으로 정리해서 외운 뒤 짝과 함께 상황극(role play)을 시키는 것이다. 서로 잘 모르는 학생들끼리 짝을 지워 놓으니 수업 분위기가 자못 진지하다. 특히 남녀 학생이 파트너인 경우 가장 열심히 하는 것 같다.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을 서로 짝지우니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다. 보기에도 즐겁다.

 

오늘은 스페인어 노래자랑 대회가 있는 날이다. 캠코더도 미리 가방에 넣고 즐거운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학생들이 열심히 준비하는 모습을 간간이 봤기에 기대가 더욱 크다. 학생들이 끼와 재능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며 학습동기 유발에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특히 기대가 되는 것은 평상시에 소심하고 자신감이 부족한 것처럼 보였던 학생들의 변화된 모습이다. 친밀도와 학습수준에 따라 의도를 갖고 조를 편성해서 최대한의 효과를 얻고자 했다. 외국어 학습에서 자신감이라는 정의적 영역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는 너무나 분명하다. 바라건대는 오늘 수업을 통해 나의 모든 선원들이 자신감 넘치는 외향적 성격으로 변해 최대의 학습효율을 얻었으면 한다.

 

드디어 조명이 꺼지고 멋지게 분장을 한 학생들이 화려한 소품과 안무로 서막을 장식한다. 평소에는 성실하지 않던 선원이 오늘은 제일 열심이다. 캠코더로 찍으면서 나 자신도 경탄할 정도로 열심히 준비를 했다. 노래 제목이 가을이라고 낙엽을 가득 담은 상자를 둘이나 들고 와서 여기 저기 뿌리며 한껏 분위기를 낸다. 이들의 열정에 난 괜히 가슴이 뭉클하다. 소품 빌리러 외국대사관에까지 갔다 왔다는 한 학생의 말을 들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학기말이 가까워 오고 난 우리 선원들이 목적지에서 하선할 준비가 됐는지 점검한다. 우리의 항해가 결실을 맺는 때이다. 우리의 항해가 장차 있을 인생의 긴 항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한 명 한 명 배웅을 한다. 한 선원이 그간의 항해가 너무 좋았노라고 참 감사했노라고 말한다. 의례적인 인사말인지도 모를 그 한 마디는 긴 항해로 만신창이가 된 나의 배를 말끔하게 새단장하게 하고 나는 또 다른 항해를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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