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0-11-24 15:19 (화)
세상의 모든 시간 - 느리게 사는 지혜에 관하여
세상의 모든 시간 - 느리게 사는 지혜에 관하여
  • 교수신문
  • 승인 2020.04.29 09: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느림으로의 초대, 기꺼이 응할 가치가 있다”

가치 있는 일은 항상 시간 필요
지름길 대신 둘러 가는 길 선택해보길
가치 있는 삶 원동력은 느림과 기다림

토마스 기르스트 지음│이덕임 옮김│을유문화사│242쪽

속도에 대한 이야기는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중반부터 회자되어 온 ‘느림의 미학’에 대한 논의에서도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디지털 기술의 유혹과 인생의 속도에 대해 고민을 한 바 있다. 첨단 기술의 속도를 인생의 속도에서도 부작용 없이 따라갈 수 있을까에 대한 문제 제기는 1999년 이탈리아에서 제안하여 만들어진 ‘치따슬로(cittaslow)’ 즉 슬로시티(slow city) 운동을 출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슬로시티 운동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염원하면서 나타난 운동으로, 기술 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빠름이 주는 편리함을 손에 넣기 위해 값비싼 느림의 즐거움과 행복을 희생시키고 말았다는 데서 그 필요성을 찾는다. 슬로시티의 철학은 성장에서 성숙, 삶의 양에서 삶의 질로, 속도에서 깊이와 품위를 존중하는 것이며, 느림, 작음, 지속성을 통해 세상을 품위 있게 숙성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토마스 기르스트는 예술과학 연구소(Art Science Research Laboratory)에서 연구책임자로 재직하였고, 이후 BMW그룹의 국제문화 분야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뮌헨예술원에서 강의하면서 역사와 문화, 예술에 깊이 관여해 왔다. 예술사학자인 그는 문화와 예술에 대해 국제 신문, 잡지, 카탈로그, 논문 등에 광범위하게 다양한 글을 써 왔는데, 이 책에서는 느리게 사는 지혜를 다루며 ‘세상의 모든 시간’이라는 개념에 집중한다. 저자는 “문화사와 과학사에서 이룬 위대한 업적을 살펴보면서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노력의 범주가 무엇인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생각하는데 독자의 ‘시간’을 할애해 주기를 당부한다. 또한, 스스로 압박을 벗어던지고 지름길 대신 감히 둘러 가는 길을 택해 보라고 제안한다.     

<세상의 모든 시간>에는 프랑스 작은 시골 우편배달부인 슈발이 10,000일, 93,000시간, 33년간 돌을 나르며 노고의 세월을 거쳐서 만들어 낸 꿈의 궁전, 미국의 팝 아트 예술가인 앤디 워홀이 만든 600개가 넘는 타임캡슐 시리즈, 독일 할버슈타트에서 639년간 연주되는 오르간 음악곡 「Organ 2/ ASLSP(As SLow aS Possible)」 , 14세기에서 19세기 사이에 기록된 조리법을 이용한 영국 식당의 요리법 등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건축, 음악, 과학, 식문화, 환경, 수학을 아우르는 문화사가 펼쳐진다.  

우편배달부 슈발이 직접 지은 꿈의 궁전. (사진=을유문화사 제공)
 「Organ 2/ ASLSP」 이 연주되고 있는 오르간. (사진=을유문화사 제공)

저자의 이러한 제안은 소셜 네트워크로 연결된 세상에서 친구나 가족, 혹은 타인과 늘 소통할 수 있지만 정작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우리로 하여금 ‘잠시 멈춤’을 하게 만든다. 그러고 나서 많은 시간을 소요해서 이뤄낸 다양한 일들의 가치를 독자들에게 소개하면서, “가치가 있는 일은 뭐든 항상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메시지를 통해 내면의 풍요로움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저자는 현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모든 것이 끝난다 할지라도, 후손들에게 살만한 환경을 가진 지구를 물려주어야 한다는 책임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날 길은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기도 한다. 이처럼 저자의 느리게, 지혜롭게 살기에 대한 제안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측면이 크다. 다만, 일부 표현상에서 우리의 일상에서 나타나는 ‘시끌벅적함’을 “쓰레기 같은 거리”와 같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일견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우를 범한 점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마르셀 뒤샹의 사후 전시 작품인 <에탕 도네>의 사례의 경우, 이 작품의 영향력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지만 작품 속 여자의 오른쪽 팔에 적혀진 1946~1966이라는 작품 제작 연도만으로 그가 사라졌던 20년간의 시간을 이 작품에 쏟았다고 연결 짓는 해석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구석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소개하는 특별한 존재들은 “순간적인 쾌락만을 추구하고 게으름을 멸시하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시간의 힘’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느림으로의 초대에 기꺼이 응할 가치가 있다. 

“자연의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시간적인 존재다. 자라고 변하고 소명하는 존재, 숨을 마시고 내쉬고 긴장하고 이완하고 자고 일어나는 존재다. 
…(중략)… 현재를 천천히 사는 것이 곧 현재를 늘리는 방법이다. 세상의 속도에서 빠져나와 나만의 속도를 발견하라. 그래서 더 오래 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더 가볍게 더 충만하게 살 거라는 점은 확실하다.”   -- 울필라스 마이어(<해피 에이징> 중에서)
 
이 책 <세상의 모든 시간>은 빠름의 시대에 오히려 빛나는 ‘느림’의 미학을 떠올리게 해준다. 우리가 더욱 가치 있고 충만하게 살기 위한 원동력이 될 느림과 기다림을 받아들일 자세를 갖추게 한다는 점에서 기꺼이 우리의 시간을 내어 줄만 하다.

한주리 서일대 미디어출판학과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