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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29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29
  • 김용준 교수
  • 승인 2003.11.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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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튀는 싸음과 화학자의 길

내가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한 것은 1965년 9월 7일이었다. 그런데 김포공항에 도착하기 12일 전인 8월 26일에 서울지구에 위수령이 발동되고 6사단 병력이 서울에 진주하고 있었다. 법률적으로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계엄령에 준하는 어느 특정한 지역에만 내리는 계엄령이라고 이해되는 말하자면 일종의 비상사태인 셈이다. 그래서 학교는 휴교중이었다. 1964년의 6·3사태에 이은 두 번째의 비상사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의 고려대학교 화학공학과 교수직의 취임도 늦어지고 있었다. 당시에 나는 아직 사표가 수리되지 않은 상태여서 국립공업연구소의 연구관이었기 때문에 일단 10월 1일자로 촉탁교수로 고려대학교 화학공학과의 강의를 맡게 되었다. 이 때의 나의 심정은 참담 그 자체였다. 미국에서도 부자의 주로 알려져있는 텍사스 주의 주립대학에서 그야말로 호사스러운 분위기에서 학위논문 연구실험을 하였고 그에 앞서 워싱톤 디씨에 위치한 연방정부 산하의 표준국 연구소에서 과장해서 말하면 아세톤을 수돗물같이 사용할 수 있는 풍요로움을 만끽한 후였다. 거기다가 나의 학위논문과 관련해서 귀국 도중에 일본 동경대학의 농학부를 견학하고 돌아왔다. 미국에서 갓 돌아오는 나의 눈에는 동경대학 농학부의 건물은 막말로 미국 대학의 변소만도 못한 초라함을 엿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안내를 받고보니 그게 아니었다. 사람 다니기에도 좁을 정도로 첩첩이 물건이 쌓여있는 비좁은 연구실 곳곳에 대학원생들은 그야말로 아무 여념없이 실험을 수행하고 있었다. 화려하지 않다 뿐이지 있을 것은 다 갖추고 있었다. 컴컴한 연구실 구석구석에 대학원생들은 개미같이 일하고 있었다. 그 초라한 건물보고 첫눈에 이런 곳에서 무슨 성과가 나오겠는냐고 비웃었던 나는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는 돌아가서 한 20년 이를 악물고 덤비면 글쎄, 일본쯤이야 따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다지면서 귀국하였다. 그런데 국립공업연구소도 고려대학교도 이것은 완전히 적막강산이었다. 거기에다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공연히 귀국한 것이 아닌가라는 후회도 해 보았다. 오파를 받은 몇몇 미국의 대학 및 연구소들의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 나는 같이 귀국한 누이와 같이 효자동에 있는 경복교회를 찾았다. 8·15 해방 직후에 나의 고향 천안에서 대한 예수교 장로회 중앙 교회를 개척하신 인광식 목사님이 담임하고 계신 교회였다. 내가 80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나는 유기화학자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신 분이 바로 인광식 목사님이시다. 앞으로 기독교는 과학자의 손에 의해서 더욱 그 영역을 넓혀 나갈 수 있을 것이니 절대로 과학을 포기하지 말라고 20을 바라보는 홍안의 소년에게 타일러 주신 목사님이셨다. 그러니 명색이 이학박사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내가 인광식 목사님이 담임하시는 그 교회를 찾아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교회에 들어서는 우리 남매를 단상에서 보신 목사님이 예배 후 광고 시간에 신문에서 이미 보셨겠지만 오늘 우리 교회에 귀한 손님이 오셨다고 장황하게 우리 남매를 추켜세우시는 것이었다. 아마도 지금 한 시간 강의에 2,3만원의 강사료에 고소를 하고 있는 젊은 이 나라의 학자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앙천대소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어떻든 안 목사님은 어느 일간신문 동정란에 '오누이 박사 귀국'이라는 2단정도의 우리 오누이 사진이 신문에 실렸던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어서 예배 끝난 다음에 교인들의 뭇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인사에 바빴는데 어느 허름한 복장의 노인이 오셔서 인사를 청하시는 것이었다. 그 분이 장면정권 하에서 상공부 장관을 역임했다는 당시의 큰 기업체 천우사의 전택부 회장님이셨다. 이런 인연으로 나는 천우사의 기술고문이 되었다.

귀국한지 일년쯤 지났을까? 고대교수 휴게실에서 차 한잔 마시고 막 강의실로 들어가려는데 전화가 왔다고 사환이 나를 불러 세웠다. 전화를 받고 보니 생각지도 않게 아버님이셨다. 그래서 어떻게 전화를 주셨느냐고 말씀 드렸더니 여기가 한국화약 사장실이라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몇 차례 한국화약에서 전화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때마다 완곡하게 거절하곤 하였는데 이번에는 아버님까지 동원해서 불러대니 꼼짝 못하고 지금 플라자 호텔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던 시멘트 콘크리트 건물에 있는 한국화약 사장실로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사장실에 들어가 보니 이제는 고인이 되셨지만 故 김종희 사장님과 그의 형님이 되시는 김종철 회장님이 아버님과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여기서 내가 한국화약의 기술고문이 된 사연을 길게 늘어놓을 마음은 없다. 어떻든 처음에는 좀 불쾌할 정도로 기분도 상했지만 한국화약 측에서는 고대를 그만두고 자기 회사의 기술담당 중역으로 부임해 줄 것을 간청하기에 이른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화약의 회장실을 무상출입할 수 있는 기술고문이 되었고 당시 서울은 그야말로 교통지옥이었는데 검은 짚차를 거의 전용으로 배당받는 특별대우도 받았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당시 큰 기업체를 운영하는 총수들은 기술개발 따위는 별로 안중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기술고문이라는 역할을 내가 어느 정도로 감당했는지 자세하게 이야기할 계제는 아니지만 천우사도 그렇고 한국화약에서도 내나름대로 적지않은 기술고문으로서의 공헌은 하였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총수들은 기술개발이라는 장래에 대한 비전보다는 당장 필요한 기술은 외국에서 사오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고 우선은 어떻게 정부로부터 좋은 혜택을 받느냐 하는 문제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은 지금보다 훨씬 심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경유착은 어쩔 수 없는 고질이 아닌가 생각된다. 미래를 위한 하부구조에 대한 투자에는 별로 흥미가 없어 보였다.

1966년도에는 대한화학회의 총무간사직을 수행해야만 했고 한편 대학교수로서 대학원생 지도를 위시해서 대학생활에서도 여념이 없었다. 1963년도에 신설된 이공대학의 공학부라는 사실이 엄청나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내가 소속된 화학공학과만 하더라도 전임교수란 당시 공학부장직을 맡고 있었던 최한석 교수와 나뿐이었다. 그러니 우선 전임교수를 찾는 일이 급선무였다. 둘밖에 없는 전임교수의 한 분은 공학부장이니 나는 자연히 과장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부임한지 5년 후인 1970년에는 공학부장직을 맡게되니 학교에서 귀국 후 몇 년간의 나의 생활은 불문가지였다. 한가지만 부연한다면 이제는 거의 모든 분이 정년 퇴직하였지만 30여명의 신임 교수들을 나의 공학부장 시절에 선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의 나의 대학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바빴는지 대변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득불 '내가 본 함석헌'의 본줄거리에서 동떨어진 내 이야기만 늘어놓게 되었지만 그러나 위와 같은 화학자로서의 내 생활이 당시 '사상계'지를 중심으로 팽팽하게 정부당국과 맞서있는 함석헌-장준하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던 불꽃튀는 싸움에서는 나는 비켜서 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회유하려다가 번번히 실패한 박정희 정권은 월남파병 및 오히라(大平)메모로 회자되는 한일협정 정국을 끌어가면서 장준하는 1967년 5월 8일에 두 번째로 투옥되었다. 그런데 부정선거로 악명높은 '6·8국회의원 부정선거'에 장준하는 옥중출마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당시 동대문 을구에서 육사 9기생으로 청와대 비서실장을 역임한 민주공화당 서울시 당위원장인 강상욱과 맞싸우는 옥중출마이니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여러분 장준하를 살려주십시오. 장준하 사상계 사장을 국회로 보내 주셔야 합니다. 안그러면 장준하, 이 사람 감옥에서 죽습니다. 자살할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머리와 수염은 물론이고 한복과 두루마기까지 모두 하얀색 일색으로 단상에 올라선 함석헌은 이렇게 울부짖으면서 두루마기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이래서 기적은 일어나고 만다. 장준하는 강적 강상욱을 2만여표 차로 누르고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헌정사상에 드문 기적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무렵 나는 거의 빠지지 않고 선생님의 일요집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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