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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밍아웃 : 암이 탄생시킨 새로운 단어들
암밍아웃 : 암이 탄생시킨 새로운 단어들
  • 장성환
  • 승인 2020.04.27 11: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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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경험자들의 가슴에서 건져 올린 단어들
"암 진단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내가 잘못 산 것도 아니다" 

 Vol.1 제주도 편 |조진희 외 지음 | 아미북스 | 156쪽

삶의 굴곡은 사람마다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낸다. 각자의 시간과 경험이 쌓여 만들어 낸 이 단어들은 그 사람의 삶을, 아픔을, 행복을 드러낸다. 암 경험자들에게는 어떤 단어들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을까? '암'이라는 큰 산을 만난 이들이 이 산을 넘으며 만난 새로운 단어들은 무엇일까?

이 책에 등장하는 조진희, 정승훈, 유정윤, 이정훈 이 네 사람은 모두 암 경험자다. '암'을 통해 삶의 새로운 '앎'을 알아간 이들을 '아미'라 부른다. 아미북스는 이 아미들의 가슴에서 단어들을 건져 올려 첫 책을 만들었다.

암이 탄생시킨, 아미들의 가슴에 새겨진 새로운 단어들은 때론 슬프기도, 때론 뭉클하기도 했다. 아미들과 제주도의 낮과 밤을 보내고, 숲과 들과 바다와 오름을 오가며, 그들의 단어에 마음을 입히고 색을 더했다. 그렇게 탄생한 반짝반짝 빛나는 아미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자 중 한 명인 유정인씨(유방암 1기)는 ‘민둥머리’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항암 치료 시작 전 마음 먹었었다. 손가락 사이로 한 움큼씩 빠지는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좌절과 상실에 울음을 터트리는 비운의 주인공은 되고 싶지 않다고. 병원으로 향하기 전 미용실을 찾아 머리를 밀었다. 두근두근 감았던 눈을 뜨고 바라본 내 민둥머리는…“의외로 괜찮은데!!”. 항암을 시작하고 제대로 음식을 챙겨 먹기 힘들어 부모님 댁에 가서 며칠씩 머물다 돌아오곤 했다. 방 한 칸을 차지한 채 늘 누워 있던 나는, 방을 나설 때면 두건이나 모자를 쓰고 나갔다. 내 머리를 보고 아파할 부모님의 모습이 너무나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물 한 모금도 입에 넣을 수 없던 어느 날, 두건 한 장 챙기기도 버거웠던 나는 두건 없이 방을 나섰고, 나의 민둥머리를 본 엄마는 울었다. 그날 나의 민둥머리는 엄마의 눈물이 됐다.   

이정훈씨(혈액암 4기)는 ‘커피’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마음을 드러냈다. 

암 환자가 되기 전 사람들을 만나면 어김없이 술을 즐겼다. 사람들을 만나면 폭탄주를 만들어 나누고 술잔을 부딪치며 웃었다. 암 환자가 된 후 술을 끊었다. 지금의 나를 위해, 그리고 앞으로의 나를 위해…그러면서 알게 됐다. 내가 술을 좋아하기보다 그때의 분위기를 즐겼다는 것을. 이제 나의 선택은 커피다. 내가 좋아하는 이들에게 폭탄주 대신 나만의 커피를 만들어 커피를 사이에 두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래서 요즘 난 사람들과 카페에 간다. 

저자 중 정승훈씨(버킷림프종 3기)는 “결국 암을 진단받는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내가 잘못 산 것도 아니에요. 그냥 어느 날 다가온 사건인데 ‘네가 환경이 좋지 못한 곳에 살아서 그래,’ ‘네가 그일을 해서 잘못이야’, ‘너의 유전자 때문이야’ 등의 이야기를 자꾸 듣게 되면, 내가 한 과거의 선택들을 원망하며 살게 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책 말미에는 저자들이 투병하면서 만난 ‘동기’들과의 속 깊은 대화가 실려있다. 누가 물어주지 않기에 앞서 말할 수도, 누가 따져 묻지 않기에 먼저 설명할 수도 없었던 오해와 배려의 이야기들이 따뜻하게 펼쳐진다.  장성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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