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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동아시아 근대성의 탐색 - 『동양적 근대의 창출』(히야마 히사오, 소명 刊)과 『중국현대문학과 현
[테마] 동아시아 근대성의 탐색 - 『동양적 근대의 창출』(히야마 히사오, 소명 刊)과 『중국현대문학과 현
  • 교수신문
  • 승인 2001.03.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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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3-20 21:53:19
권보드래 / 덕성여대 강사·국문학

‘동양적 근대의 창출’과 ‘중국 현대문학과 현대성 이데올로기’를 한데 묶으려니 어색하고 좀 불편하다. 1976년과 2001년이라는, 무려 4반세기에 이르는 시간 차이도 문제려니와, 한쪽은 대중적 저작이요 다른 한쪽은 연구논문 모음집이라는 차이도 걸린다. 루쉰과 소세키를 통해 ‘동양적 근대’의 모색 과정을 재구성해 보겠다는 히야마 히사오의 구상과 중국 현대문학의 주요 지점을 짚으면서 근대적 주체가 형성되어 온 추이를 살핀다는 정진배의 구도 사이의 거리 또한, 어쩔 수 없이 걸음걸이를 조금 절뚝거리게 만든다. 이 두 책이 같은 자리에 놓일 수 있다면 그것은 지금의 정황 때문이리라. ‘동아시아’라는 화두는 만발하지만 실제 연구 성과는 초라한 시점에서 ‘동양적 근대의 창출’의 번역과 ‘중국 현대문학과 현대성 이데올로기’의 출간은 모처럼 만나는 소중한 성과다.

동아시아 담론이 선 자리

히야마 히사오의 ‘동양적 근대의 창출’은 한국에서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동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일본에서는 오래 전에 자리잡았음을 알려주는 작업이다. 일본인으로서 중국현대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일본·중국 각각에서 ‘근대’가 어떻게 구상되고 실천되었는지를 묻는다. 질문의 첫 자락에 깔려 있는 것은 “동양의 비애”, 즉 “서양의 모방이 곧 근대화라 착각해 온” 왜곡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다. 중국과 일본은 근대 이후의 판이한 여정에도 불구하고 “동양의 비애”를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서구에 의해 근대화되고 서구를 모범으로 삼아 온 역사야말로 우리 자신의 무의식에 깔려 있는 원초적 상흔이기 때문이다. 서구를 모방하려 안간힘쓰고 좀처럼 좁혀들지 않는 거리에 절망하면서 비서구인들은 자학과 자기 혐오를 배운다. 저자는 이 같은 서구 콤플렉스를 털어버리기 위해서는 “동양적 근대”의 발견과 창출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근대의 긍정이 곧 서구적 근대라는 모범의 수락일 필요는 없다. “인간해방의 실현”이라는 목표를 공유하되 “운명이나 환경에 있어서 선천적으로 다른’” 동양 나름의 길이 있지 않을까. 루쉰과 소세키라는 근대 초기의 두 거인이 새삼 중요해지는 것은 이 지점에서이다.
루쉰의 중요성이야 다시 말할 필요가 없겠다. 근대를 개척했지만 동시에 언제나 근대를 넘어서고자 했다는 점에서 보면 소세키 또한 주목해야 할 인물이다. 루쉰과 소세키는 둘 다 신·구의 질서가 충돌하는 현장에서 자랐고, 서구 문명의 위력을 절감하면서도 거기 압살당하지 않았다. 서구적 근대라는 이념에 현혹되는 대신 ‘지금, 여기’를 살아가야 하는 자로서의 자세를 중시하였다. 신·구 양쪽에 발 딛고 선 자로서, 또한 어느 쪽도 절대적인 가치일 수 없음을 알아차린 자로서 루쉰과 소세키는 서구의 판박이가 아닌, 근대의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아 나선다.
그렇지만 히야마 히사오는 루쉰과 소세키 사이에 간과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 또한 잊지 않는다. 루쉰이 때로 전통에 대해 격렬하게 반발했던 반면 빠른 속도로 전통을 등지고 있었던 일본에서 성장한 소세키에게는 그런 기미가 없었고, 루쉰이 자기 표현을 절제했던 반면 소세키는 훨씬 개방적으로 자신을 드러냈으며, 루쉰이 동아시아의 역사를 ‘노예의 역사’로 읽은 반면 소세키는 ‘다른 가능성을 상상해 볼 수 있는 창조로서의 역사’로 받아들였다는 사실 등이 그 증거이다.
히야마 히사오가 그린 ‘동양적 근대’의 가능성이 패권주의의 위험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묻고 싶기는 하다. 책 서두에 나오는 “동양의 비애”라는 말이 그 발언자인 저우쭤런의 친일 경력과는 무관하게 다루어져도 좋은가, 소세키가 ‘滿韓紀行’에서 보인 중국·한국에 대한 냉담한 반응이 과연 ‘동양적 근대’라는 말과 어울릴 수 있는가 따져보고 싶기도 하다. ‘동양’이라는 말부터 일본의 팽창욕을 배경으로 한 말이요, 이미 1970년대 중반에 루쉰과 소세키를 함께 다룬 대중적 저작을 낼 수 있었던 저력 또한 제국주의의 지역 연구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게 아니냐는 공연한 시비거리까지 오락가락한다. 그렇지만 오늘날 새로이 ‘동아시아의 근대’라는 문제를 다루려는 한국에 있어 이 책이 갖는 의미는 만만치 않다. 이제 비로소 중국과 일본이 함께 시야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다.

‘동양적 근대’와 패권주의의 위험

시야에 들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한국·중국·일본의 근대화 경험을 나누면서 ‘또 다른 근대’를 고민하기 위해서는 탐구에 내실을 더해야 할 필요 또한 절실하다. 정진배의 ‘중국 현대문학과 현대성 이데올로기’는 이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는가를 확인케 해 주는 책이다. 한국에서 중국 현대문학 연구가 개척되기 시작한 지는 20여년을 헤아리지만, 뚜렷한 성장을 보인 것은 근래 10년 사이의 일이지만 본격적인 연구서는 별로 없는 형편이다. 이 책이 짊어진 무게가 만만치 않을 것은 당연한 일, 과연 저자는 책 앞뒤에서 인식론의 일반적 문제까지 제기해내면서 중국 현대문학의 요소요소를 누빈다. 5·4 시기에서 1942년 옌안 강화 무렵까지, 루쉰·후쓰·위다푸·마오둔·취추바이 등은 물론이고 후일 대만의 향토 문학까지 다루면서 저자는 중국에서, 또한 중국 문학에서 근대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가 내놓는 대답은 루쉰이나 소세키의 근대 인식과 놀랄 만큼 닮았다. “중국의 근대 수립은 하나의 고정된 유토피아적 전망을 향해 매진하는 미래지향적 개념이 아니라, 중국의 ‘현재’ 그리고 ‘여기’에서의 실재하는 필요에 가장 적합한 대응 형식을 통해 재현되는 미정형의 실체일 따름이다”.
이 “미정형의 실체”가 거듭 구상되고 실천되었던 내력이 중국 현대문학의 역사이다. 어떤 실체도 전제하지 않기에, 저자는 “진정한 목표는 어떤 것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구축하는 것”이라는 피카소의 말을 기꺼이 빌어온다. 고정된 대상, 인식 주체로부터 독립되어 그 자체 불변하는 대상이란 없다. 모든 대상은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며 담론화됨으로써 존재를 얻는다. 그러므로 “고정된 5·4의 실체를 밝혀내는 작업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이 5·4를 어떻게 구성해 내는가”가 중요해지고, 백화문 운동의 功過 대신 “논쟁이 ‘환기’하는 지점들을 포착해 이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재구”할 필요가 절실해지며, 또한 장르나 형식을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인간이란 이미 결정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현실을 창조하고 현실과의 관계 또한 창조하는 존재인 것이다.

동아시아적 근대의 동력은 무엇인가

5·4 시기에 근대적 자아 의식이 싹텄다거나 백화문 운동을 통해 문학의 대중화가 이뤄졌고 좌익문학이 계급적 각성을 촉구했다는 등의 논의는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근대를 산 중국인이 계몽과 求亡, 개인의 발견과 민중의 의식, 독창성과 계몽성 등 서로 모순될 수밖에 없는 명제를 두고 고투했고, 그 과정에서 주체와 대상에 대한 다양한 기획을 실험했다는 점에 있다. 그때그때 주어진 조건 속에서 근대를 기획하고 실천해 나가는 힘, 동아시아의 근대를 만든 동력은 바로 이 힘이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동아시아의 근대는 아직 미정형이다. 약자였기에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진다는 역설적인 명제가 성립할 수 있을지(동아시아에서, 한국에서), 그리고 그 밖의 외부에서 지금 답해야 할 문제는 바로 이것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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