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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 학문의 '실전현장'
학이사: 학문의 '실전현장'
  • 이해준 공주대
  • 승인 2003.1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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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준 공주대/사학

문헌을 중심으로, 그리고 연구실에서 주로 이뤄지는 역사학 연구의 일반적 모습에 비할 때, 나처럼 직접 현장을 찾아 자료를 찾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 따라서 현지 자료조사의 어려움이나 재미를 아는 사람도 그만큼 많지 않다. 사람들은 그저 내가 조선후기 향촌사회사를 주된 연구분야로 하면서 고문서 자료를 찾아다니는 사람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현장자료에 관한 한 나를 ‘불가사리 같은 식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놀리는 사람도 있다. 좋게 보면 칭찬이지만, 나쁘게 보면 욕도 된다. 하기야 능력도 없으면서 문헌자료와 고문서자료는 물론이고, 유적, 지명, 구비자료, 민속자료, 문화지리 자료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 자료를 다 조사한다고 설치니 그렇게 욕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별명에 대해 나는 절대 부끄럽지도 않으려니와, 속내로는 오히려 남보다 나은 내 강점이라 내세우고 싶을 정도이다. 적어도 자료 수집과 조사에 관해서 말한다면 말이다. 사실 나의 이런 습성은 나의 성장과정과 연관된다. 나는 원래 문헌사학도가 아닌 박물관의 학예연구사로 처음 학문의 길을 알았다. 대학박물관과 연구소의 조교로 1970년대 초?중반 각종 발굴조사의 실측을 도맡았다. 지금도 가끔은 자랑스럽게 말할 때가 있지만, 백제 무령왕릉의 내부 실측도면을 내가 그렸다면 잘 믿기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박물관 학예연구사였기 때문에 문헌이외에 다양한 종류의 문화유적과 유물, 고고학과 미술사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나는 대학원에서 조선 후기 사상사를 전공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문헌사의 방법을 익히게 되었고, 졸업 후에는 故 윤남한 중앙대 교수를 도와 문집정리 작업을 하기도 했고, 규장각에서는 고도서 해제작업, 고문서 정리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같은 다양한 유적과 유물, 기록자료 정리의 경험은 당시 나와 비슷한 년배의 초학자들과 비교할 때 매우 특이한 체험이었다. 여기에 더해 1981년 목포대학에 부임한 이후로는 인접 문화분야 연구자들과 함께 도서지역의 자료를 조사?정리하게 됐는데, 이때 나는 섬 마을에서 기록된 자료나 유적 찾기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료가 없다고 하여 섬사람들의 역사?문화가 없었다거나 무의미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쓰여지지 않은 역사, 쓰여질 필요가 없었던 역사의 흔적들을 찾기 위하여 정말 나는 진땀나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리고 이때서야 비로소 나는 역사학과 민속학?사회학?인류학?지리학의 만남이 정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 필자도 인간인지라 솔직하게는 그 동안 자료 수집에 기울인 공력이 너무도 아깝다고 생각한 때도 많았다. 솔직히 외로운 행보를 전혀 몰라주는 것에 대한 서운함도 없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고, 특히 무수한 발굴자료를 다른 연구자의 손에 맡기면서 또 다시 현지조사에 신이 났던 몽매함(?)도 생각이 난다.

한편으로 자료를 찾아 이곳 저곳을 다니다 보면 참으로 많은 것들을 배우고 느끼게 된다. 혹자는 금방 ‘자료’ 수집이나 그에 대한 욕심을 떠올릴지 모르나, 사실 나의 경우는 항상 새로운 자연과, 자료를 매개로 만났던 여러 모습의 사람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자료나 연구도 물론 중요하지만, 역사의 현장을 내 발로 다녀본다는 것과, 역사의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삶과 생활사를 통해 더 많은 역사의 진면을 읽을 수 있었던 까닭이다.

전혀 나와는 다른 생활환경과 성격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마음을 읽고, 때로는 비위를 거슬리지 않으면서 자료를 얻어 낼 수 있는 경험은 참으로 인생사에서 다시 배울 수 없는 ‘실전 현장’이라고도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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