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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53)] 물의 불평등
[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53)] 물의 불평등
  • 교수신문
  • 승인 2020.04.01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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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배

우리말에 그릇에 대한 묘사가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워낙 많은 그릇이 나와서 그런 것인지 나도 그릇 묘사를 못하겠다. 정말 많은 그릇이 있다. 그런 것들도 그릇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우리말로 그릇이라고 해보자. 내가 말하는 그릇이란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는 온갖 용기(容器)를 말한다. 우리말로는 ‘담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을’에는 물이 들어간다. 왜? 그릇의 용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 또는 물과 같이 흐르는 것을 담아도 새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웬 그릇 타령인가? 산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물과 불인데, 지금 있는 여긴 불은 되는데 물이 안 돼서 그런다. 요즘 불은 휴대용 가스레인지가 있어 대충 된다. 물도 사면 된다고 하지만 가까이 파는 데도 없고 그건 마실 물이지 생활용수가 아니다. 생활이란 세수, 설거지, 청소, 변소 그렇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씻어내기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물이다. 물이 없으면 사람이 꼬질꼬질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산촌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도시인 아닌가. 손가락만 까닥해도 물이 나오는 데서 살지 않았는가. 

아랫집에는 물이 넘쳐난다. 지하수에 파이프를 묻어놓아 그야말로 퀄퀄 나온다. 물맛도 좋지만,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다. 나오는 대로 흘러버리는 그 물이 너무 아까울 뿐이다. 막걸리 한 통을 드리고 허락받아 물을 길어 쓰고 있는데, 알다시피 물의 무게가 보통이 아니다. 외국에서 차 없이 살 때 생수를 나르느라 고생한 생각을 하면 아직도 고개가 설레설레 흔들리는데, 지금 내가 그 꼴이다. 물을 한 번 나르면 허리가 뻐근하고 숨이 헉헉 찬다. 그래도 뒤로 물러설 수 없다. 난 깨끗하다!   

이것이 현재 나와 아랫집에서 벌어지는 물의 불평등이다. 아프리카에서 물 때문에 고생하는 장면에 동병상련한다. 물을 길으려고 먼 데까지 가야 하는 처지다. 물 부족 국가라는 말도 떠오른다. 나는 부족한데 아랫집은 충족하다 못해 넘쳐흐르니 나는 물 부족 가정이다. 
그러면서 용기에 대한 생각이 자주 난다. 물 뜨는 것보다 물을 옮기거나 담아놓는 용기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산중으로 들어오면서 면사무소 근처의 철물점에서 물통을 두 개 샀는데, 그 크기가 남자들이 양쪽으로 물을 간신히 들을 수 있는 만큼이다. 예전에 시골에서 장군 지듯 양손으로 들면 균형이 맞는다. 그런데 물통이 되면 뭐 하나? 물을 받아놓고 쓸 여러 용기가 필요해진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물을 저장해둘 데다. 찾다 보니 뚜껑 있는 다라가 하나 나온다. 그것을 씻어 나의 저수고로 쓰니 일단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다. 설거지와 몸을 씻는 용이라지만, 위급하면 그거라도 마셔야 한다. 

그리고 가는 김에 많이 떠올 요량에 이런저런 물통을 찾는데 그것도 없다. 도시에 넘쳐나는 PT병이 머릿속에 동동 떠오른다. PT병은 있는데 사라진 뚜껑에 난감함을 느낀다. 그래서 막걸리 통 등 온갖 뚜껑 있는 것으로 물통을 삼는다. 동네 분들 드리려고 면에서 막걸리를 사온 것이 천만다행이다. 

나도 산에 다녀본 사람이다. PT병 나오기 전에 물을 갖고 다니기가 얼마나 힘들었는가. 알루미늄 수통도 늘 샜다. 그리고 샘을 찾기 위해 50미터를 넘어 500미터까지 갈 때의 수고로움을 기억한다. 그리고 여행 중 바가지 물로 온몸 씻기도 많이 해봤다. 큰 손수건만 있으면 가능하다. 그러나 여긴 산중(山中)이긴 하나 산정(山頂)도 아니고, 강우량이 얼마 이하인 사막도 아니고, 며칠씩 가는 장거리 기차도 아니다. 나는 정말 깨끗하다!

오랜만에 물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어 좋다. 옛날 어머니들의 수고로움을 느낀다. 그런데 물 뜨러 가면 물부터 실컷 먹는다. 내 배로 물을 채우고 오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정말 좋은 그릇이다.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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