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적 관점을 견지하는 사회과학자들은 대체로 한국의 경제정책 기조가 ‘신자유주의’에 기반해 있다고 규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들에겐 우리 헌법의 경제이념이 독일의 ‘질서 자유주의’와 유사하다고 보는 헌법학계의 견해가 다소 생소하게 여겨질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의 제헌헌법이 당시로선 가장 진보적인 헌법으로 꼽히던 독일의 바이마르 헌법을 기본모델로 삼았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헌법학계의 주장에도 수긍할만한 여지는 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문화된 조항으로 존재했을 뿐 현실에서는 한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는 반론이 따라붙지 않을 리 없다.
여기서 말하는 ‘질서 자유주의’는 전후 독일의 프라이부르크 학파에 의해 주창된 ‘사회적 시장경제’의 경제이념으로 국가를 “시장경제의 유기적 구성부분”으로 설정하고, “경쟁질서의 창출과 유지를 위한 국가개입”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는 점에서 모든 국가개입을 ‘시장경제의 적’으로 간주하는 신고전주의/신자유주의와 구별된다. 국내에서 질서 자유주의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정부가 집권한 1998년경부터다. 이후 질서 자유주의는 줄곧 한국 사회과학계에서 뜨거운 논쟁거리로 자리잡아왔다. 논의는 주로 ‘김대중정부의 경제정책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형성됐다. 거칠게 구분한다면, 정부정책에 우호적인 학자들이 DJ노믹스의 기본이념을 ‘질서자유주의’로 규정하는 경향을 보인 반면, 부정적으로 보는 학자들은 그것의 ‘신자유주의적 본질’을 강조하는 입장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남북경협이 본격적으로 추진됨에 따라 점진적 ‘경제통합’에 기대가 고조되는 가운데 북한 경제체제에 대한 관심 역시 증가하는 추세다. 북한은 알려진 대로 50년이 넘게 엄격한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고수해온 지구상의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다. 학자들은 대체로 그것이 구소련과 동독의 경제모델을 전범으로 삼고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한동안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던 동구권 연구자들이 새삼 학계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도 당연하다.
지난 2월 중순 발간된 502권째 대우학술총서는 최근 국내 사회과학계의 관심을 적절히 반영한 책으로 눈길을 끈다. 독일의 경제학자 한넬로레 하멜이 편집한 ‘사회적 시장경제·사회주의 계획경제’(안병직·김호균 옮김)가 그것이다. 독일 마르부르크대학 부설 ‘경제조종시스템 비교연구센터’ 연구위원 및 ‘경제질서 문제’ 편집장으로 있는 편자 하멜은 ‘중부독일 경제질서에 적용된 소련의 지배원리로서의 민주집중제’(1966), ‘유고슬라비아의 노동자 자주관리’(1974) 등의 편·저서로 알려진 원로 동구권 전문가.
이 책은 ‘사회적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계획경제’라는 두 개의 대안적 경제시스템을 대변하는 동·서독 경제체제의 형성과 변화과정을 △경제 시스템의 사회이론적 정초 △경제 시스템의 질서정책적 형성과정 △경제 시스템의 기능 메커니즘 △계획실패 대 시장실패 △거시경제적 불안정성과 경제정책적 조정 △사회정책-주변여건과 구조라는 6개의 격자를 통해 조망한다.
이 책의 미덕은 무엇보다 필자들의 시각이 객관적이라는 데 있다. 우선 이들은 적대적인 두 개의 시스템에 대한 비교연구가 저지르기 쉬운 이데올로기적인 편향으로부터 자유롭다. 이를테면 이들의 연구는 두 시스템의 작동방식을 체제 내적인 논리에 입각해 설명한 다음, 그것이 안고 있는 내적 결함과 한계를 지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철저하게 내재적 비판의 관점을 취하고 있는 셈이다.
서독과 동독의 경제시스템을 동시에 다루고 있지만 정작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서독의 ‘사회적 시장경제’다. 무엇보다 이것이 몇 년 새 국내외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제3의 길’ 담론과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개인의 책임과 사회적 연대성의 조화, 권리와 의무의 조화를 강조하는 제3의 길 노선과 시장과 국가 사이의 관계를 대체관계가 아니라 보완관계로 설정한 사회적 시장경제 노선은 시장의 실패와 국가의 실패를 동시에 극복하려는 하나의 목적을 공유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울러 최근 한국경제에서 관심을 끌고 있는 사회정책 문제와 관련해서도 사회적 시장경제는 긍정적인 ‘모델 케이스’가 되기도 한다. ‘생산적 복지’라는 이름아래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복지정책의 초석을 다져나가는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시장의 정합성을 왜곡하지 않으면서 추진되는 소득과 자산의 재분배, 사회정책에서의 개인원리와 사회원리의 조화로 상징되는 사회적 시장경제로부터 참조할만한 선례가 적지 않은 까닭이다.
이세영 기자 sylee@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