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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 역사의 틈을 메우는 전기문학 ―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1, 2』(문화과학사), 『마키아벨
[책들의 풍경] 역사의 틈을 메우는 전기문학 ―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1, 2』(문화과학사), 『마키아벨
  • 최익현 기자
  • 승인 2001.03.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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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거시, 문학-역사 아우르는 평전
어릴 적 ‘위인전’을 읽은 기억이 아직 새롭다. 위인전은 위인들의 전기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의 위인들은 인간적으로나 임무수행에 있어서나 흠이 없고 훌륭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으로 묘사되었던 듯하다. 비교적 생생한 기억과는 달리, ‘나도 커서 저런 사람이 되어야지’라는 순진한 생각은 자라면서 서서히 사라지는 경험을 갖게 되었다.

출판계의 효자로 떠오른 전기문학

위인전을 포함하는 이야기(서사)는 대부분 주인공으로 사람을 설정한다. 그 사람은 상상 속의 인물일 수도 있고, 역사 속의 인물일 수도 있다. 전자는 소설을 비롯한 문학작품의 형태에서 그렇고, 후자는 흔히 전기(평전) 혹은 자서전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자서전에 비해 문학적 요소를 많이 차용하고 있는 평전의 매력은, 실증적인 역사 자료와 진술 등을 통해 특정한 개인을 역사 속에 재배치하는 작업에 있다. 또한 이 점이 대부분의 평전을 사후에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 출판계의 특색으로 바로 이 평전, 즉 전기문학의 높은 인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체 게바라 평전’(장 코르미에/실천문학사)의 경우에는 인문학 분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출판사에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고 한다. 대학가에서는 티셔츠까지 유행시켰을 정도였으니, 그 인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 외에도 ‘한나 아렌트’(알로이스 프린츠/여성신문사),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1, 2’(레이 몽크/문화과학사), ‘마키아벨리 평전’(로베르토 리돌피/아카넷), ‘자크 라캉 1, 2’(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새물결), ‘함석헌 평전’(김성수/삼인) 등이 있다.
그렇다면 갑작스레 평전이 독자들의 호응을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과 같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첫째, 스타는 많으나 영웅이 사리진 시대에 영웅을 보고 싶은 대중들의 심리 때문이다. 이때 영웅은 범인이 아니라 비범한 삶을 살다간 이를 포괄할 것이다. 둘째, 점점 ‘가상 현실’이 늘어나는 환경에 비해 평전은 철저한 고증작업을 통한 실존 인물의 재현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리얼리티’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는 ‘리얼리티의 역설’을 맞고 있다. 셋째, 8,90년대를 지나오면서 사상과 이론의 소개가 상대적으로 풍부해지면서 투명하고 정리된 학문보다는 그 학문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과 개인적 환경 등에 관심을 갖게 된 때문이다. 이는 정리된 거시사의 한계를 넘어서 삶의 조각들을 길어올리는 미시사에 대한 관심의 확장과도 맞물려 있다. 이 속에서 평전은 특정한 그물망을 통해서만 바라보는 역사적 보편성을 거부하고 그 망을 빠져나가는 다양성과 특수성을 되살려놓고 있는 것이다.
‘마키아벨리 평전’을 쓴 리돌피는 초판서문(1953년)에서 앞서 마키아벨리에 관한 두 권의 기본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쓴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다. “그 속에서 전기적인 부분은 과도한 분량의 해석적·비판적·역사적 내용에 파묻혀 사라져버린다. 그리하여, 독자는 그의 생애에 대한 사실들을 연속해서 파악할 수가 없으며, 그것을 신속히 찾아보기도 어렵게 되어 있다. 빌라리는 무려 3백페이지를 지나서야 마키아벨리에 관해 약간 언급하기 시작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방대한 세 권짜리 저술의 여기저기에는 많지 않은 전기적 단편들이 엄청난 자료의 소용돌이 속에서 떠다니고 있다.”
삶의 단편은 필연보다는 우연과 친하다. 역사는 항상 우연이 필연을 이뤄갔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20세기 최고의 전기 작가로 꼽히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스테반 츠바이크가 ‘단 한번의 긍정이나 단 한번의 부정, 혹은 너무 빠르거나 늦은 일회적 사건이 역사를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몰고간다’고 한 통찰은 타당하다. 좋은 평전은 어떤 것일까. 리돌피의 소박함은 적절한 답을 제공해준다. “나는 나 스스로가 오랫동안 읽고 싶었던 책, 즉 마키아벨리의 생애에 대한 평이하고도 인간적인 서술로서 그 자신의 행동과 말을 통해 그를 그리고자 한 그러한 책을 쓰려고 노력했다.” 결국 평전은 미시와 거시를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며, 역사와 문학의 중간 위치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프린츠는 ‘한나 아렌트’의 서문에서 “진정 그녀는 누구였는가? 쉽게 대답할 수가 없다. 시인이었는가? 철학자였는가? 정치적 사상가였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어쩌면 이 물음은 평전을 쓰는 이유를 머금고 있을 지도 모른다. 역사와 학문으로 규정된 개인의 삶을 다른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전기를 쓰는 이유가 될 것이다.

미시-거시, 문학-역사 아우르는 평전

한 개인 내부에는 동일자와 타자가 동시에 공존한다. 그러한 공존은 의식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실제의 삶 속에서도 서로 다른 모습을 갖기 마련이다. 역사적 인물로 드러나는 모습은 항상 ‘표상(representation)’의 형태를 띠기 때문에 일상과 광기는 모두 삭제되고 만다. 대부분의 개인 저작은 구체적인 삶과 실천에 바탕하고 있다. 예를 들면 라캉의 욕망이론이 나이 일흔이 넘어서도 위상학을 배우고 바타이유의 아내와 사랑에 빠지는 등 그의 모든 삶을 관통하는 욕망과 호기심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전기의 힘이다.
이러한 노력은 삶과 철학(비트겐슈타인), 도덕과 정치(마키아벨리), 휴머니스트와 혁명가(체 게바라), 실천과 철학(아렌트) 등의 구분 자체를 흐리게 만든다. 비트겐슈타인의 전기를 쓴 몽크는 이것을 가리켜 ‘틈을 메우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의 생애를 알지 못한 채 철학만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그의 삶에 매력을 느끼지만 철학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양극단으로 나뉜 불행”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러한 불행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학이 윤리학에 바탕하고 있음을 보지 못한 때문이다. 몽크의 평전은 그 둘을 한 이야기 안에서 말하고 있다.
최익현 기자 ihchoi@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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