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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가 주는 가르침
이끼가 주는 가르침
  • 교수신문
  • 승인 2020.04.01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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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로빈 월 키머러 |역자 하인해 |눌와 |276쪽

올해 초 출간된 한 권의 책을 두고 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이 “2020년 올해의 책이 벌써 나왔다”며 환호했다. 뜸들이지 않겠다. 로빈 월 키머러의 <향모를 땋으며>가 그 주인공되시겠다. 북아메리카 원주민 출신 식물생태학자인 저자는 원주민이 신성하게 여기는 향모 등의 식물이 인간의 삶에 어떤 유익을 주는지 토박이들의 지혜와 과학을 엮어 선명하게 설명한다. 저자는 식물과 인간, 크게 보면 자연과 인간이 호혜성의 원리 아래 더불어 살 수 있다는 주장을 풀어낸다. 발전 혹은 진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진정으로 추구해야 정신을 이제는 잊혀진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삶의 자취에서, 그것도 과학적 원리와 함께 찾는다는 점에서 <향모를 땋으며>는 2020년 올해의 책 후보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다만, 오늘 소개할 책은 같은 저자의 다른 책이다. 제목은 <이끼와 함께>인데, <향모를 땋으며>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면서 그 그늘에 살짝 가려졌다. 하지만 내용만큼은 그에 못지않은 내공을 자랑한다. 저자는 이끼를 통해, 역시 토박이의 지혜와 과학을 절묘하게 엮어낸다. 생각해 보면 이끼는 별다른 이점도 없는 식물처럼 보인다. 오히려 (적어도 내게는) 계곡 등 물가에서 놀 때 미끄러져 상처만 내는 식물이며, 청소를 게을리 한 웅덩이 같은 곳에 자리 잡는 식물일 뿐이다. 그런 이끼가 인간 삶에 무궁무진한 가르침을 준다니, 더구나 그걸 과학의 원리와 원주민들의 지혜를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 보여준다니, 놀랍지 않은가. 그래서겠지만, 저자는 이끼를 일러 “작지만 우아한 식물”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끼를 보는 법은 “시각이 아니라 청각에 가깝다”고 말한다. 물과 어우러지며 다양한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물소리가 거기서 거기라고 말할 사람이 많겠지만, 이끼와 어우러지는 물소리는 “엘리베이터에서나 나올 경음악이 아니라 견고하게 짜인 베토벤 4중주”와도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만큼 주변과 잘 동화된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저자는 “크기가 큰 식물들이 살 수 없는 공간을 차지”하며 “작은 몸집을 축복으로 여기는” 이끼가 “독특한 구조를 공기와 지면 사이에 작용하는 물리법칙에 맞춤으로써 번성”하는 이치를 조곤조곤 설명한다. 저자는 “누가 내 조카에게도 이를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겸손한 말을 썼지만, 실상 큰 것만을 탐하는 인간들이 새겨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역할 분화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이끼도 있다. 최초의 꼬리이끼속 이끼들은 다양한 종으로 분화했는데 모든 생명이 그렇듯 종마다 생김새도 다르고, 서식지와 삶의 방식도 달라졌다. 대개의 종에게 옛날에 형제자매였던 사실은 소용없다. 같은 종인 인간은 여전히 싸우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꼬리이끼속 가족은 여느 대가족의 자매처럼 각자 맡은 역할을” 해낸다. 꼬인꼬리이끼는 다른 이끼들이 좋아하지 않는 노출된 나무뿌리나 맨바위를 서식지로 삼는다. “눈인의 짧은 머리처럼 잎이 깔끔하게 위로 곧은” 잎눈꼬리이끼는 “상당히 썩은 통나무에만 서식하며 남들과 거리를” 두며 살아간다. 코로나19 사태로 사회적(물리적) 거리두기를 강조하고 있는 시점에서, 슬픈 이야기지만, 그것마저 제대로 못하는 우리는 이끼보다 못한 셈이다.

이끼가 사회적 거리두기만 잘하는 게 아니다. 어떤 이끼들은 한 지붕 아래도 오순도순 산다. 네삭치이끼와 잎눈꼬리이끼는 친척이 아닌데도 “같은 숲에서 같은 나무에 같은 시기 동안” 서식한다. 생태학 이론에 따르면 “두 종이 매우 비슷해서 서로 필요가 없는 경우 경쟁에서 하나는 쫓겨나야” 정상이지만, 두 이끼는 어쨌든 공존한다. “빛의 세기나 온도 또는 화학적 조성에 따라 공간을 나눌 것”이라고만 추측할 뿐, 두 이끼의 공존의 수수께끼는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생명의 신비는 끝이 없고, 인간이 머리 숙여 배울 점도 하나둘이 아니다. 

도시에도 제법 이끼가 서식한다. 보도블록 틈에, 길 위 갈라진 틈에 수백만 개의 은이끼가 살고 있다. 은이끼가 원래 살던 서식지가 독특하게도 “여러 측면에서 도시 환경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끼와 공존을 원하지 않는다. 심지어 “엄청난 돈과 시간을 들여” 이끼 제거에 나선다. 이끼낀 지붕은 “지붕널이 썩고 있다”는 징후로, 결과적으로 “집을 관리할 책임을 방기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집값 내려간다는 이웃 주민의 따가운 눈총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끼는 “조용히 생태계의 밑바탕을 이루는” 식물이다. 그럼에도 이끼의 존재 그 자체와 쓰임새는 간과된다. 그러니 이끼가 주는 가르침을 이해할 턱이 없다. 고전(古典)의 금과옥조에서 배울 것이 많지만, 하찮아 보이는 이끼에서도 배울 것이 적지 않다. 세상 모든 것에서 배워야 하는 인간만이 아무것에서도 배우려하지 않는다.

글_장동석 출판평론가, <뉴필로소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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