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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의 Cinelogue] 이 모든 고통은 지나가리라
[정재형의 Cinelogue] 이 모든 고통은 지나가리라
  • 교수신문
  • 승인 2020.03.20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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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예술영화와 상업 오락영화의 차이는 안과 밖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초희 감독의 <찬실이는 복도 많지>(이하 <찬실>)는 장르 영화가 아니다. 일상의 잔잔한 현실을 그린 독립예술영화다. 영화 피디 찬실은 감독이 죽는 바람에 졸지에 실업자가 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후배 집의 가사도우미로 살아가기로 한다. 문득 그녀는 공중에 뜬 존재가 된다. 영화를 해야 하는데 하지 못하니 그녀는 삶이 허망하다고 느낀다. 정신적으로 죽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화는 현실과 환상을 교차시킨 서사구조를 갖는다. 환상 속에서 자신이 좋아했던 배우 장국영이 옆방 남자로 나타나고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구조는 찬실의 의식구조를 드러낸다. 그 구조 속에서 그녀는 좌충우돌하고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한다. 이런 방황을 보면 인간은 분명 정신으로 산다. 인간이 안주하고 싶은 것은 정신이지 결코 물질이 아니다. 물론 그녀가 가사도우미로 살아갈 정도로 물질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밀려들어오는 우울 바이러스와 정체성 상실 바이러스의 침투를 막고 살아남기란 정말 힘들다. 그녀의 정신은 분열되어간다. 그 시점에서 배우 장국영이 현시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나태주 시인의 유명한 시 ‘풀꽃’의 구절은 영화의 주제를 함축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 이 구절은 영화 <찬실>을 비유한다. 이 시가 영화 속에 나온다. <찬실>은 떠들썩한 현실을 찬찬히 들여다볼 때 보이는 그런 영화다. 지금과 같은 코로나 현실을 밖에서 볼 때 떠오르는 영화들은 <바이러스>, <컨테이젼>, <감기> 그런 영화들이다. 그 시끄러운 일상의 속으로 깊이 들어가 반복되는 진부한 풍경을 오래 들여다보면 <찬실>이 보이고 <집시의 시간>, <동경이야기>가 보인다. 너무 절망스럽다 보면 울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아직 이성이 있을 때는 미친 사람이 무섭고 귀신이 무섭다. 그러나 내가 미쳤고 귀신이면 더 이상 무서울 게 없다. 

찬실은 자신의 일이 파탄 나면서 문득 존재를 상실한 바닷속에서 허우적댄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다. 오랜동안 해왔던 일을 벗어나 다른 일을 하다 보면 왜 사는지에 대한 깊은 회의의 파도가 밀려온다. 연애도 못하고 잘 살지도 못하면서 오랫동안 해왔던 일에 대한 애정이 점점 멀어져 갈 때 그녀에게 다가오는 두려움은 단지 물질적 공허함이 아니라 삶 자체에 대한 목적 상실이다. 

찬실이 깊은 슬럼프에서 헤쳐 나온 것은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게 아니다. 또 다른 자기 장국영과의 대화, 즉 깊은 성찰이다. 장국영은 자신이 본격적으로 삶을 사랑하게 된 애착의 근원일 것이다. 자신과의 끈질긴 대화가 그녀를 수렁에서 벗어나게 했다. 미스터리를 파헤치듯 호기심을 동반한 환상 구조가 영화를 보는 재미를 놓치지 않게 한다. 제목에서부터 풍겨오는 반어법적 냉소주의도 빈정거리는 투가 아니어서 나쁘지 않다. 지루한 예술영화들의 계보를 따르고 있지만 이 영화는 정작 지루하지 않다. 

찬실의 얼굴은 야위어가고 그녀는 혹시 자신이 나무에 걸린 과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풍성한 과일들의 연결과 감독의 죽음, 한참 이후에 나타난 둥근 보름달, 그리고 찬실의 회복. 일상의 심오함이란 그런 것이다. 극중 찬실은 말한다. 맹세하지 마라. 하물며 달도 기우는데. 차면 기울고, 다시 찬다는 것. 그게 이 영화의 주제다. 고통은 영원하지 않다. 지금의 이 모든 고통은 지나가리라. 진실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일상에서 열심히 추구하라. 영화는 이미지로 설득하고 있다. 

정재형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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