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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50)] 전염병을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사람들
[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50)] 전염병을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사람들
  • 교수신문
  • 승인 2020.03.20 10: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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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 취약군
바이러스가 인터넷 강의 시대를
앞당기는 역설적인 현실.
표정 없는 강의도 강의일까?

국가적 재난이라고 불리는 전염병 사태에서 머리에 자꾸 맴도는 것이 있다. 낱말들이다. 

이 전염병은 과거에 염병이라고 불리는 ‘돌림병’이었다. 국어사전에도 당당히 등재되어 있는 이 말을 쓰지 않는 까닭이 뭔지 모르겠다. ‘유행병’이라고 하면 좀 더 세련된 것처럼 느끼는지, 아무도 돌림병이라 말하지 않는다. 유행이면 나도 시류에 따라 한 번쯤 걸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주고, 돌림이면 누구나 돌아가야 하는 것이니 나에게 닥쳐올 시련이 무서워서 그런가? 이왕이면 한글을 쓰자는 것이 내 주장인데, 돌림병이라고 말하면 남들에게 눈치가 보이나? 

오히려 좋은 점도 있을 수 있다. 돌림병이란 말은 이 전염병이 보편화되고 일상화된다는 마음가짐을 갖게 하고 따라서 덜 무서울 수도 있다. 유행병이란 말은 내가 유행을 안 따라가면 그만이기 때문에 자신은 청정구역에 있다는 안도감을 주지만 우리가 군집생활을 하는 한 그럴 수 없다. 돌림병은 과거의 괴질이기에 쓰지 않고, 유행병은 현대의학으로 그런대로 처치할 수 있기에 쓰나? 그러나 지금의 전염병도 아직까지 치료제를 찾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염병(染病)은 어떤가? ‘염병’이 ‘염병할’이라는 욕이 되었으니 전통사회에서 얼마나 무섭고 더럽고 치명적이었나 알 수 있다. 염병에 걸려 뒈질 놈이라는 뜻이니 말이다. 어느 나라에 이렇게 의학적인 욕이 있나 싶다. ‘페스트에 걸릴’, ‘좀비에 물릴’, ‘에이즈에 죽을’ 이런 욕을 들어보았는가. 우리는 한센 병이 염병이라는 것을 알고 ‘문둥이(문디) 자식’이라는 욕까지 썼으니 참으로 의학적 민족이다. 그런데도 염병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역병(疫病)은 어떤가? 역 또한 돌림병을 가리킨다. 전염이란 말은 사실 병에는 정확한 말이 아니다. 전염(傳染)은 좋은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염 자는 염색의 염, 나염의 염으로 물들인다는 뜻일 뿐이다. 근묵자흑(近墨者黑)도 있지만, 삼인행(三人行)이면 필유아사(必有我師)도 있다. 해피 바이러스에 전염되자는 이야기는 그저 역설적인 표현이니 빼자. 염보다는 병을 뜻하는 역(疒)이 훨씬 정확한 표현이다. 그러나 어려운지 역병이란 말도 쓰지 않는다. 

종교단체에서는 악질(惡疾), 대악질이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전도를 하는데, 문자적으로 악질은 병일뿐이지 역병은 아니니 옳은 표현은 아니다. ‘그는 췌장암 같은 악질에 걸려 고통을 받으며 죽었다’ 정도로 써야 할 단어다. 아니면 순악질(純惡質)처럼 ‘악밖에는 다른 것이 없는 순수한 악’이라는 뜻에서 차라리 대악질(大惡質) 병으로 쓸 수는 있겠다. 

사람들은 무섭고 더러운 단어는 잘 안 쓴다. 그것이 언어고, 언어습관이고, 언어 현상이다. 그러나 배후에 정부의 음모가 있다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국민이 불안해할까 봐, 시민생활의 안정을 위해서, 경기 침체의 요소를 줄이려고, 못쓰게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받아들이시겠는지? 

제자가 인턴을 끝내고 대구에 갔다가 못 나오게 되었단다. 아파트에서 보이는 거리가 ‘유령도시 같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생필품은? 모두 택배란다. 여기서 ‘바이러스 취약군’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사실 힘든 사람들은 전염병에 노출되어있는 사람일 것이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택배기사를 비롯해서(요즘은 서명도 안 하지만), 노숙자는 물론이고 요양원을 비롯한 합숙 신세의 사람들이 그렇다. 좁은 공간에서 일하는 택시 기사도 그렇다. 거기에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의사, 약사도 포함된다. 개학 후 100명 내외의 대규모 강의로 강제되는 교수, 강사도 포함될 수 있다. 

엉뚱한 마무리. 그런데 좋던 싫던 마스크를 쓰고 하는 강의를 옳다 할 수 있을까? 표정 없는 강의도 강의인가? 이렇게 바이러스는 인터넷 강의의 시대를 앞당기고 있다.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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