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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재 학연문화사 대표] 고고학·미술사 출판 32년…베스트 셀러 아닌 베스트 밸류 진력
[권혁재 학연문화사 대표] 고고학·미술사 출판 32년…베스트 셀러 아닌 베스트 밸류 진력
  • 장성환
  • 승인 2020.03.20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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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미술학자 찾아 방방곡곡 누벼
1천여종의 고고학 미술사 서적 출간 업계 대표로
국공립도서관부터 도서 구입 앞장 서야
신라왕릉연구, 대중에 꼭 알리고 싶어
권혁재 학연문화사 대표, 한국출판협동조합 이사장
권혁재 학연문화사 대표, 한국출판협동조합 이사장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면서 출판업계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특히 대학 교재나 전문 서적을 출간하는 출판사는 불법 복제 등의 이유로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힘든 환경 속에서도 출판에 대한 사명감으로 돈보다 신조를 지키며 가치 있는 책을 남기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권혁재 학연문화사 대표다. 출판은 단순히 책을 내는 작업이 아니라 역사를 기록하는 숭고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지난 16일 서울 금천구에 있는 학연문화사를 찾아갔다.  

- 대표님이 출판 일을 시작하시게 된 계기는?

“대학에서 출판학과를 졸업하고 출판사에 들어가면서 출판 일을 처음 시작했다. 그곳에서  고고학이나 미술학 관련 교수들을 많이 만나게 됐는데, 대화해 보니 나와 잘 맞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고고학이나 미술사 분야 책을 내는 출판사를 만들고 싶어졌다. 입사 후 3년 정도 지났을 무렵인 1988년 일하던 출판사를 나와 학연문화사를 설립했다. 출판사 이름 때문에 며칠을 고민하다 학문을 연구한다는 의미를 담아 학연문화사로 짓게 됐다. 출판사 초기에는 고고학자나 미술학자를 많이 알지 못해 지인께 물어 전국으로 찾아다녔다. 그 당시에는 교통이 지금처럼 편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방을 다니는 게 굉장히 힘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활동했던 고고학자와 미술학자 200명을 일일이 다 만나 봤다. 그 인연이 계속 이어져 지금까지 1천여 종 가량의 책을 출간하면서 우리 출판사가 고고학과 미술학의 대표적인 출판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 출판사 설립 당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출판사 초기에는 혼자 이런저런 일을 다 하다 보니 당연히 힘들었다. 책을 집필할 만한 교수가 누군지 잘 모르니까 여러 곳에 물어보고 자문을 구한 뒤 책을 출간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학술 출판업계가 호황이라 직원도 늘고 큰 어려움 없이 출판사를 운영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10년 이후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다시 힘들어졌다. 우리 출판사가 출간하는 전문 서적들은 주로 대학교 도서관에서 많이 구입하는데, 대학 등록금이 계속 동결되면서 도서관 예산 감소로 책 구입비가 줄어드니 출판사도 당연히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고고학이나 미술사 관련 책은 일반 학술 서적보다도 훨씬 전문적인 책이다. 특히 예전에는 구석기 시대, 고구려사 등 큰 단위로 연구했는데 최근에는 전기 구석기와 근대 구석기 등 분야가 세분화되면서 수요층이 적어지니 책을 출간해도 잘 안 팔린다.” 

- 출판사 대표로서 출간을 결정하는 기준은?

“고고학이나 미술 쪽 현장을 직접 다니면서 여러 이야기를 듣는데 그걸 중심으로 판단해서 책을 낸다. 많이 팔릴 것 같은 책보다는 단 몇 사람만 본다고 하더라도 내용이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면 출판을 결정하는 거 같다.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닌 책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 대표님만의 철학이나 신조가 있는지?

“많은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좋은 직업을 가지려 노력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얼마나 보람된 일을 하고 사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버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고 또 누군가는 명예를 높이는 게 인생의 목표일 수 있지만 나는 책을 출간하면서 굉장히 큰 보람을 느낀다. 특히 많은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그분들이 오랜 기간 연구한 내용을 책으로 낼 수 있다는 게 너무 자랑스럽다. 단순히 책을 내는 게 아니라 역사를 기록한다는 사명감으로 출판 일을 하고 있다.

또 책 만드는 데 돈을 아끼면 안 된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 출판사는 주로 연구서적을 내는데 이런 책들은 한 번 보고 버리는 게 아니라 몇십 년 동안 읽힌다. 그래서 오랜 기간 보관해야 하니 좋은 종이를 사용해 책을 만들고 있다.”
 
- 지난 30여 년간 학연문화사에서 출간한 책 중 대중에게 꼭 소개하고 싶은 명작이 있다면?

“먼저 ‘신라왕릉연구’를 꼽을 수 있다. 이 책은 故 이근직 교수가 경주에서 20여 년간 문헌 기록을 뒤지고 현장을 답사하면서 얻어낸 신라 왕릉의 연구 성과를 담아낸 책인데 왕릉 연구뿐만 아니라 신라의 정치·사회·사상·예술을 망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 최우수 학술도서에 뽑히기도 했다.

‘한국의 단청’도 잊지 못할 책이다. 이 책의 경우 그간 연구과제로 남아 있던 한국 단청의 역사성과 각종 문양의 상징성을 밝히는 데 주력했고, 안료, 전통 재료·기법, 도재 시공 등에서도 더욱 정제된 내용을 기술했다. 이 책도 2003년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백상출판상을 받은 명작이다.
마지막으로 ‘고구려 고분벽화 유라시아 문화를 품다’는 책도 꼭 소개하고 싶다.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의 외연 확장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 책이다. 2016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됐을 뿐만 아니라 제1회 롯데출판문화대상에서 대상까지 받았다.“

- 현재 출판업계가 침체돼 있는데 다시 살아나기 위해 출판사들이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고 보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원칙을 지키면 된다. 바로 ‘좋은 책’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 같은 전문 학술 서적은 전자책이나 오디오북 시장으로 진출하기에 한계가 있다. 국·공립 도서관 같은 곳에서 학술 서적을 구입해 줘야 한다. 그런 곳에서 책을 사 주지 않으면 출판사 유지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처음에 고고학과 미술사 분야 전문 서적을 내는 출판사를 차린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가족들과 직원들 모두 잘 건사하고 있어 참 감사하다. 지금까지 출판사를 하면서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지만 손해 보지도 않았다. 그거면 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돈보다는 고고학과 미술학 연구에 기여했다는 보람이 더 큰 것 같다. 앞으로도 좋은 책 많이 내고 고고학과 미술사 연구가 잘 발전할 수 있도록 헌신하며 살고 싶다.”

장성환 기자 gijahwan90@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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