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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과 소수의 목소리
개혁과 소수의 목소리
  • 장상환 경상대
  • 승인 2003.03.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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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로 세평

지난 대선에서 부유세 도입과 무상교육, 무상의료 실시를 공약으로 내건 민주노동당이 약진하고 제도정치에서 시민권을 획득했다. 가난하고 학력이 낮은 사람들이 많이 지지했다. 공정한 분배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들이 많은 지지를 얻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그 후 한달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이러한 논의들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인수위가 구성돼 다음 정부의 정책과제가 결정되는 과정인데 인수위와 재벌, 정부 관료들간의 대립만 언론에 부각되고 있다. 정부 부처들은 노무현 당선자의 공약에 대해 수용불가라는 입장을 밝혀 인수위 관계자의 반발을 샀다. 전경련의 김석중 상무가 노무현 정권의 경제정책의 목표를 사회주의라고 극언한 것이 뉴욕타임스에 보도돼 인수위 측이 해명과 사과를 요구하는 일도 발생했다.

인수위와 차기 정부는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그들의 목소리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여야 정확한 실태를 포착할 수 있다. 정부 각 부처에서 보고받는 것이나 언론 보도를 참고하는 것만으로는 사태의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정부 부처와 언론기관은 기득권 세력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보고와 언론 보도는 오히려 개혁을 저지하는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지난 9일에는 두산중공업에서는 노동조합 간부 배달호씨가 분신자살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배달호씨의 사망을 야기한 책임은 재벌과 정부, 법원, 언론이 함께 져야 한다. 공기업을 인수한 두산재벌은 이윤추구에만 급급해 노동자들을 대량해고하고 각 부서 생산관리자들까지 노조 탄압에 동원하고 파업에 대해 손해배상 소송을 해 임금 가압류를 자행했다. 정부는 발전노조 파업시 일반 조합원에게까지 손해배상 소송을 하도록 해 조합원들은 무려 4백억원의 가압류를 당했다. 법원은 이러한 재벌과 정부의 무리한 노동자 탄압을 합법화시켜 줬다. 매일경제는 상공회의소의 재정지원을 받아 ‘한국은 노조공화국인가’라는 특집을 꾸미고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을 해댔다.

새 정부는 보통 국민들을 이러한 기득권 세력의 횡포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해야 한다. 합리적인 사회 운영을 위해서는 재벌체제와 언론의 개혁, 공공적 성격의 교육기관이나 의료기관의 사유물화 근절, 노동자의 기본권 보장 등이 이뤄져야 한다. 소수자의 경제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소득재분배를 통해 사회보장 체제를 확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개혁과제들을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해결하려 해서는 안된다.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촌각을 다투는 문제이다.

개혁에는 저항이 따른다. 재벌은 개혁대상으로서 당연히 저항한다. 저항을 극복하고 개혁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힘이 뒷받침돼야 한다. 사회적 약자의 요구를 담은 목소리가 바로 개혁에 대한 저항을 무너뜨리는 힘이 된다. 새 정부의 정책결정과정에 고통받는 소수자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반영돼야 할 것이다. 인수위는 현 정부가 하고 있는 일을 정확하게 파악함과 동시에 민주노동당과 사회당, 노동자, 농민, 빈민, 노점상, 장애인 등 소수자 관련 단체 및 사회적 약자 개개인의 목소리도 널리 청취해야 한다.

이번 대선에서 지배세력이 결집한 한나라당이 패배한 것은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이득만 취하려 할 뿐, 병역과 납세의 의무 등 사회에 대한 책임은 지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그들의 부를 쌓게 해줬는가. 노동자들이 아닌가. 지배세력들은 노동자 기본권 보호의 의무를 지키고, 충분한 세금을 내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한 가난한 서민들의 생활을 보호해야 한다. 이것이 이뤄지지 않는 한 우리 사회는 빈부간, 노자간의 대결과 극한 저항이 반복되는 비극과 야만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수위와 새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소수자의 목소리를 힘의 원천으로 삼아 개혁을 추진해, 기득권 세력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이것에 실패하면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김대중 정부나 한나라당처럼 바로 정치적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인수위는 낮은 곳으로 향해야 한다.

장상환 경상대·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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