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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 꿈꾸는 낮 꿈
‘다른 삶’ 꿈꾸는 낮 꿈
  • 박명진
  • 승인 1970.01.0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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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외국보다 낯선 사투리

▲박명진 교수 /
요즘 ‘개그 콘서트’의 ‘생활 사투리’ 코너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특히 김시덕이 뱉어내는 무뚝뚝한 경상도 사투리는 장안의 화제이다. 이를테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경상도식으로 말한 “내 아를 낳아도”가 그것이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두 사나이가 투박하게 내뱉는 사투리는 세련되지 못하고 폭력적이기까지 한데, 이 코너가 패러디한 ‘생활 영어’ 프로그램의 이미지와 상충되면서 웃음을 유발한다.

김대중 정권은 영어 회화를 마치 과거 ‘국민교육헌장’을 외울 때 그랬던 것처럼 온 국민이 숙달해야 하는 대상으로 신격화했다. 영어 회화 능력의 습득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어떤 궁극적인 목적지, 말하자면 극복돼야 할 현대성의 극점처럼 다가왔다. 전국민의 영어화라는 광풍은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유아에서부터 직장에서 눈치를 보아야 하는 수많은 중년들에 이르기까지 두루 영향을 미쳤다. 영어 회화 습득이 대다수 국민의 수행 과제로 인식되고 있는 이때, ‘생활 사투리’ 코너의 질박한 지방어 행렬은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다음을 보자.
“첫번째 문장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워 아이 니, 알럽유, 이히 리베 디히. 어떻게 표현합니까? 전라도요? 어따 거시기 허요.”

이쯤 되면 영어 회화와 우리나라 사투리의 위상이 역전된다. 유럽어 ‘알럽유’를 알타이어 ‘어따 거시기 허요’로 고쳐 익히는 어학 강습이 된다. 초·중·고 교과서에 한민족의 빛나는 문화유산으로 빠짐없이 ‘한글 창제’로 기재하고 있는 나라이면서도, ‘한글날’을 국경일에서 가차없이 빼버리고 일상생활의 곳곳에 영어가 개입돼 있는 나라에서 영어와 사투리의 역전극은 상쾌하기까지 하다.

이미 영화 ‘친구’에서 장동건이 “고마 해라. 많이 묵었다 아이가”, “내가 니 꼬붕이가”와 같은 부산 사투리에 깊은 호감을 받았던 우리는 ‘생활 사투리’의 개그에서 어떤 친근감마저 갖게 된다. ‘친구’에서의 사투리가 남성 세계의 마초이즘과 히로이즘을 발산하고 있다면, ‘생활사투리’의 농담들은 격조 높은 생활 영어의 틀을 빌려 남성 세계의 천박함과 단순함을 보여준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남성성과 사투리의 페티쉬화이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두 사나이들은 조폭처럼 후배들에게 군기를 세우고, 상대 여성을 거칠게 성적 대상화한다. 마초이즘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친구’와 ‘생활 사투리’는 일란성 쌍생아이다. 이들은 상대방을 폭력으로 제압하거나 소유한다.

그런 맥락에서 최근 가수 강산에(강영걸)의 신작 두 편이 관심을 끌게 한다. 함경도 사투리의 거친 억양을 랩으로 부른 ‘명태’, 경상도 사투리 몇 마디로 이어지는 아프리카 리듬의 ‘와그라노’는 기존 상업적인 대중가요에서 시도하지 못했던 발상법을 동원하여 사투리를 음악화한 경우이다.

“와그라노 니 또 와그라노… 뭐라 케쌓노 뭐라 케쌓노 니”가 노래 가사의 전부이다. ‘라구요’, ‘태극기’, ‘삐딱하게’와 같은 전작들에서 사회에 대한 풍자와 분단의 애환에 대한 묘사를 시도했던 그는, ‘명태‘와 ‘와그라노’에서 ‘다른 삶’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지속시키고 있다. ‘다른 삶’을 억압하거나 왜곡시키고 싶은 욕망을 포기할 때 우리는 차별의 세계에서 차이의 세계로 건너갈 수 있다. 강산에도 남성적 시선에서 완전하게 자유롭지는 못한 가수이지만, 그럼에도 그의 노래들이 ‘친구’나 ‘생활 사투리’보다 더 기분 좋은 이유는 그의 노래들이 대상을 점유하고자 하는 배타적인 욕망으로부터 훨씬 자유롭기 때문이다.

호미 바바의 혼종성 이론에 의한다면, 위에서 이야기한 사투리 활용은 토속어를 재구축함으로써 민족, 국가, 가정의 단일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호미 바바가 꿈꾸는 것이 ‘틈, 경계, 섞임’일진대 사투리를 통해 ‘단일민족으로서의 우리’를 확인하는 것은 또 다른 획일주의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는 민족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의 변증법을 내세운 그람시의 생각이 우리에게 더 유익할 수도 있다. 그의 생각처럼 민족이나 민족어에서 국수주의를 지양하면서 수많은 타자들과 만날 수만 있다면, 다른 것과 섞일 수 없는 언어들의 정체성이 배타적인 정치성으로 흐르지는 않을 것이다. 사투리는 ‘다른 삶’을 꿈꾸는 낮 꿈이어야 한다. 블로흐가 말했듯이 미래의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낮 꿈 말이다.

박명진/중앙대·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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