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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예술을 통해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된 적이 있는가”
“당신은 예술을 통해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된 적이 있는가”
  • 교수신문
  • 승인 2020.03.02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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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딘스키 미디어 아트 & 음악을 그리는 사람들 2020’ 전시 리뷰

조선의 중심, 경복궁의 광화문을 등지고 세종대왕이 앉아 있는 광장을 바라보면 오른쪽에 세종문화회관이 보인다. 이곳은 굵직한 국경일 행사나 공연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건물 1층과 지하가 연결된 미술관도 있다. 이곳에서 추상 미술의 대가, 칸딘스키의 작품 세계를 현대적 감각으로 구현한 미디어 전시가 열리고 있다. 

추상 미술은 인물화나 정물화 풍경화처럼 구체적으로 대상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기쁨 슬픔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점·선·면·색채 등의 순수한 조형 요소를 가지고 구성한 것이다. 칸딘스키는 어느 날 거꾸로 세워져 있는 자신의 그림을 보다가 어떠한 형태도 인식할 수 없는 그 우연한 순간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무엇으로든 표현될 수 있다는 추상 미술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어떤 연주곡의 의미가 듣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자유롭게 해석될 수 있는 것과 상통한다. 음악이 미술보다 상위의 예술이라고 생각했던 칸딘스키는 “예술가는 영혼의 울림을 만들어내기 위해 건반 하나하나를 누르는 손이다.”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유복한 가정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난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는 대학에서 법학, 경제학,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른이라는 젊은 나이에 법학과 교수라는 안정된 삶을 살게 되었지만 칸딘스키는 그 좋은 자리와 경력을 다 포기하고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무엇이 그의 삶을 뒤흔들어 놓았을까? 그의 생애를 연대별로 기록한 것에 따르면 1896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프랑스 미술전에서 인상주의자 클로드 모네이의 <건초더미>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같은 해 열렸던 바그너의 ‘로엔그린’ 공연도 그에게 또 하나의 커다란 예술적 체험의 기회를 제공했다. 훗날 바우하우스에서 함께 활동했던 화가 ‘파울 클레’와의 첫 만남도 이때였다. 수년에 걸쳐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튀니지 등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을 여행했던 경험도 자신의 예술관을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독일로 이주하여 미술 공부를 시작한 칸딘스키는 기존의 고전주의 미술에 의문과 반발심을 갖게 된다. 정신적이고 진실에 가까운 숭고한 예술을 추구했던 칸딘스키와 동료들은 ‘청기사파’라는 그룹을 만들었고 추상 미술에 대한 자신만의 체계를 구축한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10월 혁명으로 불리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1917) 이후에는 문화정책부에서 일했으며 독일로 건너간 후에는 토탈 아트를 추구했던 예술학교, 바우하우스에서 색채학 수업을 맡아 강의하면서 [점 선 면]을 출간했다. 그의 작품들과 예술 이론은 훗날 잭슨 폴록 등으로 대표되는 미국 추상표현주의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칸딘스키가 살았던 시대는 혁명과 전쟁의 한복판이었다. 전통의 붕괴, 자본주의의 확산, 1905년 러시아 혁명, 1 2차 세계대전, 경제 대공황이 이어졌다. 그러한 혼란기를 칸딘스키는 심각한 위기로 진단하고 예술을 통해 인간의 영혼과 정신을 일깨우려고 했다. 그는 단순히 미술에 머물지 않고 음악, 문학, 오페라 등 여러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총체적 예술을 실험했다. 이번 전시는 그의 실험정신을 계승하듯 미술과 음악, 미디어 아트가 결합된 신선한 체험이었다. 

칸딘스키의 예술을 확장하여 해석한 한국 작가들의 다채로운 작품들도 이번 전시에 포함되어 자칫 고리타분하고 난해하게 다가올 수 있는 칸딘스키의 예술을 현재에도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모습으로 재탄생시키고 있다. ‘음악을 그리는 사람들’이라는 섹션에서는 정상윤, 콰야, 스팍스에디션 등 젊은 작가들이 참여하여 저마다의 개성 있는 작업들을 펼쳐냈다. 네 개 면과 천정 바닥 전체 공간을 칸딘스키의 컬러를 담은 거울로 만든 오순미 작가의 <봉인된 시간_과거>, 바이올리니스트 유진 박 등의 음악가들의 연주가 칸딘스키의 이미지들과 어울리고 있는 영상 등 실험적 작품들도 관객들에게 특별한 시청각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칸딘스키의 삶과 예술을 소개하는 인터뷰 영상도 볼만하다. 영상 속 해설가는 칸딘스키의 작품 세계를 ‘인상’, ‘즉흥’, ‘구성’이라는 세 단어로 응축했다. 인상은 “목격한 것을 시각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요, 즉흥은 “느꼈던 것을 시각적으로 표출”하는 것, 구성은 “형태와 색을 교향곡으로 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칸딘스키는 대각선, 삼각형, 불규칙한 직사각형, 곡선 등 다양한 기하학 요소들을 활용하면서 원이라는 형태에 집중했다. 그는 이 동그란 형상을 죽음, 탄생, 재앙, 구원 등을 의미하는 정신적 형태라고 규정했다.

1928년에야 정식으로 독일 시민이 된 칸딘스키는 나치 정권에 의해 바우하우스 학교가 폐교되자 프랑스 파리로 망명한다. 1937년 나치 세력이 그의 작품을 퇴폐 예술로 규정하는 모습은 한국전쟁 당시 이중섭의 그림들을 퇴폐적 음화로 취급했던 사람들의 모습과 겹친다. 파리에서 말년까지 작품 활동을 선보이던 칸딘스키는 1944년에 눈을 감았다. 그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겼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라. 당신은 예술을 통해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된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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