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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테레지아’ 인간을 강조하던 시대의 계몽군주
‘마리아 테레지아’ 인간을 강조하던 시대의 계몽군주
  • 허정윤
  • 승인 2020.02.28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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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 |저자 김장수 |푸른사상 |페이지 312

오스트리아 국모,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의 생애와 정치를 한 권의 책으로 만날 기회가 찾아왔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이자 오늘날까지도 국모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군주로도 유명하지만, 루이 16세의 장모, 즉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계몽절대주의 체제를 생각해보면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나 제정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와 마리아 테레지아를 빼놓고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계몽주의 체제를 처음으로 도입한 군주로, 오스트리아 최초로 의무 교육을 했고 견고한 계몽절대주의 체제 위에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했다. 동시에 문화적 단일화를 추구해 행정·재정·외교 분야에서 개혁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는 군제 개혁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기울이며 오스트리아를 이끌었다.

그는 오늘날 40년의 재임 동안에 오스트리아를 통치하며 강한 결단력과 여성성을 겸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위정자로 책임을 다하고 성실함을 덕목으로 삼고 직에 임했다. 여자였기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할 수 없었지만, 합스부르크·로트링엔 가문의 수장으로 유럽에서 황제와 대등한 역할을 하며, 걸맞은 대우도 받았다.

이처럼 마리아 테레지아의 개인적인 업적은 물론이고, 그가 이끈 오스트리아가 유럽 근대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작지 않음에도 우리나라에서는 해당 연구가 거의 없었다. 저자인 김장수 가톨릭관동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한국서양문화사학회 명예회장)는 특정 국가, 프로이센과 그것을 토대로 등장한 독일제국 연구에 치중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김 교수는 “독일권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해 당시 독일권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한 오스트리아의 역사도 동시에 연구해야 한다”고 적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에 대한 연구도 그러한 차원에서 필요하다.

김 교수는 책머리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왕위계승권을 부여한 국사 조칙의 제정 원인과 그 진행 과정을 다룬다. 이어 마리아 테레지아의 탄생 및 성장 과정, 프란츠 슈테판과의 결혼, 그리고 자녀들의 양육, 특히 장남인 요제프의 양육 및 결혼에 대해 살펴본다.

이어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계승과 그에 따라 발생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63)의 진행 과정과 결과를 담았다. 총 3차에 걸친 오스트리아의 왕위계승전쟁을 목차로 꾸려 전달하고, 그후 후베르투스부르크 평화조약을 보여준다. 상속 전쟁 이후 프로이센의 위상은 오스트리아와 달리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그 이후 프리드리히 2세는 계몽절대주의 정책으로 국가의 근본 개혁과 경제적 활성화를 추진했다. 그는 왕위계승전쟁에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지만 전쟁 후유증이 신민들의 생활을 어렵게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왕 등극 후 하우크비츠 백작을 내정했고, 오스트아 수석대표였던 하르흐(니더오스트리아주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 하우크비츠 개혁안을 지지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또 그는 ‘테레지아 법전’으로 각 지방의 법률을 집대성했고 이를 토대로 법률 일원화를 시도했다. 또 ‘테레지아 형법전’을 내며 오스트리아 왕국 전체에 통용되는 형법 및 형사소송법을 확립했다.

책은 마지막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1세가 갑자기 서거한 후 본격화된 요제프 2세와의 갈등과 말년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펼친 활동을 다뤘다.

한 국가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려면 주변 연계 국가의 역사 확인은 필수라는 함의를 가진다. 김 교수의 이번 책은 오스트리아 왕국 연구 활성화의 마중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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