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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흐름_서양사상 수용을 다룬 철학역사서들
출판흐름_서양사상 수용을 다룬 철학역사서들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3.10.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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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증적 현황파악 주력...수용과정의 암초는 '용어' 거듭확인

철학계가 근래에 유년기에 대한 회귀적 여행을 즐기고 있다. 유년기라 함은 小中華의 이 땅에 西學이 당도한 조선후기일수도 있고, 해외유학파가 칸트를 '堪德', 헤겔을 '希傑耳'로 소개하던 1910년대 일수도 있다. 유년기의 한국사상은 서구로부터 자양분을 수유받았는지라 철학계의 최근 역사적 탐색은 '수용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런 흐름은 몇 가지로 나타난다. 첫 번째는 철학사 전체를 놓고 과거에서 현재로 거슬러 올라오는 것이다. 얼마 전에 50주년을 맞은 한국철학회가 '철학연구 50년'을 통해 근대 이후 철학적 연구의 전개를 톺았고, 학진 프로젝트로 진행중인 '철학원전 번역을 통해 본 우리의 근대'는 20세기 초반부터 1953년까지 한국에서 서양의 시기별·지역별 철학원전 번역의 현황과 수준이 어떤지 짚어봄으로써 서양철학이 제대로 소개됐는지 여부를 가늠하고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런 연구들은 실증적인 자료분석을 통한 한국 철학연구의 학문적 형체를 구하고, 반성해보는 데 초점이 가 있다. '철학원전 번역'에서 '중세철학' 부분을 발표한 정준영 성균관대 강사는 한국에서 중세철학 도입이 철학적 동기에 근거하지만은 않았다는 점, 가톨릭·개신교 잡지에서 주로 이뤄졌다는 것, 제대로 된 번역은 1980년대 이후 시작돼 최근에야 이뤄지고 있다는 등의 현황파악과 함께, 번역된 철학자, 책, 번역용어의 변화 등을 정리한 후 결론으로 번역이 잘 이뤄지지 않은 까닭을 신학계의 폐쇄성 등에서 찾고 있다.

또 다른 연구자는 식민지시기를 볼 때 일제의 영향이 압도적인 지라 상대적으로 맑스와 관념철학 등 독일적 전통이 일찍이 소개된 반면 영미전통은 해방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자리잡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공통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번역어의 선택과 그 혼란스러움이다. 가령 철학계의 巨頭 박종홍과 김준섭은 각각의 저서에서 'Truth Table'을 각각 '진리치표'와 '진위표'로 'Rules of substitution'을 '대입의 규칙'과 '대용규칙'으로 달리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각 철학자의 번역어 채택의 의도나 그가 처한 조건 등은 구체적으로 지적되지 않아서 미진한 감이 있다

최근에 이광래 강원대 교수가 펴낸 '한국의 서양사상 수용사'(열린책들 刊)는 사상사로 지평을 넓혀서 다양한 통계자료를 통해 조선후기부터 오늘날까지 서구사상의 수용 과정을 밝혀내고 있다. 푸코를 전공한 저자는 지식고고학의 주요 관점인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을 근대정신사에 투영시켜서 서술의 지평을 확보하고 있다. 성호학파와 정약용 등을 통해 西學의 전래과정을 살피면서 저자는 "유학과 서학의 철학적 잡종화, 유교와 서교의 종교적 융합화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기존 연구는 이런 제설혼합주의적 문화의 잡종화경향을 무시한 채 서학과 유학의 '충돌'로써 문제를 조명했다는 지적도 빼놓지 않는다. 이 교수는 格物致知는 지극히 윤리적인 개념인데, 실학자들이 사회물상을 다루는 보편적 세계관으로 이것을 인식함으로써 주자학적 언설로 가득찬 지적 체계에 균열이 일어나고 "신유학에 중심축을 두고 서교를 부분 수용한다든지, 비상고적 인식의 계기가 마련될 수 있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교수의 책 또한 서학의 유입경로, 개화파와 척사파, 근대유학파의 면면들, 분단이후 철학의 편식구조 등을 자세하게 따지는 실증적 탐구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많은 부분 중국과 한국의 연구성과에 2차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이에 비해 이기상 한국외대 교수의 '서양철학의 수용과 한국철학의 모색'(지식산업사 刊)은 실증성보다 서양철학 수용의 내재적 운동법칙에 무게추가 놓인 저술로 나와있다. 이 책에서는 그러나 한 챕터로 소략하게 다루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 강영안 서강대 교수의 '우리에게 철학이란 무엇인가'(궁리 刊)는 1930년대 신남철, 한치진, 안호상의 철학용어의 성립배경, 1970∼80년대 철학자들의 과학수용, 최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유래까지 비교적 최근의 상황을 깊이있게 논의하고 있다.

이런 책들 외에 혜강 최한기에 대한 본격적인 재조명서 '運化와 근대'는 철학적 개인을 통해 근대 한국철학의 유년기를 되짚어보려는 시도이고, 이런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박종홍 철학을 비판적으로 조명한 김석수 경북대 교수의 '현실 속의 철학 철학 속의 현실'(책세상 刊)을 놓을 수 있다. 또한 철학계와 인접학계에서 개념들을 통해 정신사를 재구성하려는 작업도 꾸준히 이어진다. 서양철학 수용사를 정리하려는 철학계의 유년기 탐색은 이렇듯 조선후기부터 현대까지, 번역문제부터 창출의 문제까지, 실증적 연구부터 사변적 논의까지, 사조적 탐색부터 개념사적 접근과 인물에 대한 탐구까지 다각화되고 있다. 이 많은 논의들이 겨냥하는 건 주체성의 철학, 즉 '근대의 완성'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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