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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획―학계의 禁忌를 찾아서② : 전공불가침의 법칙
연재기획―학계의 禁忌를 찾아서② : 전공불가침의 법칙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3.10.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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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주의에 갇힌 '침묵의 카르텔'...경계 가로지르는 지적모험 필요

전공과 연구방식이 다르다는 등의 이유로 동료학자나 인접연구자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는 '전공불가침' 조약은 학계의 오래된 묵계다. 좋은 뜻에서 보자면, 전공영역의 상호인정은 신사협정일 수 있다. 그러나 학제적 연구가 증대하고, 갈수록 삶의 현실이 복잡다단해지고 있는 오늘날, 학문간 벽쌓기 또는 전공영역 안에서의 칩거형태는 매우 모순적인 양태로 비쳐진다. 이번 호에서는 학계의 이런 '전공불가침'의 문제점을 따져본다.

'전공불가침'으로 포괄된 평가자제 풍토는 구조적인 면에서 볼 때 다양한 원인과 행태, 여러 가지 변종들이 얽혀있는 복잡한 문제다. '사이'라는 관계성에서 보더라도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단절, 같은 학문에서 세부전공자 사이의 단절, 같은 주제를 전공하면서 연구방식이 다른 학자 사이의 단절 현상이 있다. 또 그 원인은 다양하게 짚어질 수 있다. 심리학자는 '한국인이 워낙 눈치국민 아니냐'라고 할 것이고, 사회학자는 학제간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해부해야 한다고 할 것이고, 정치학자는 권력의 차원에서 실마리를 풀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대립으로 제기해볼 수도 있다. 타 전공에 대한 말걸기는 비전문가의 지나가는 충고나 심지어 '잡소리'로 여기는 풍토가 만연해있기 때문이다. 재야의 학술업적에 대한 제도권의 전통적인 냉대도 전문/비전문의 권역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재야학자들은 고립돼 있다. 혼자 자료를 보고 혼자 생각하다 보니 비판적인 지적을 받을 기회가 없어 시행착오를 많이 겪는다. 만약 학계와 교류할 수 있었다면 기간을 반으로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는 재야미술사학자 서정록 씨의 말은 사정을 잘 알려준다.

눈치보기, 정체성고민, 동업의식의 관행들
학문에 대한 개념설정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점에서 이 문제를 살펴볼 수도 있다. 가령 학문을 엄밀한 논리적 진술체계로 간주하느냐, 아니면 현실과의 끊임없는 교호 속에서 변화해가는 것으로 간주하느냐에 따라, 아니 그 가운데 어떤 것에 무게감을 두느냐에 따라 전공불가침에 대한 입장이 다를 것이다. 과학성이란 바벨탑을 쌓기 위해 달려온 한국 학계는 外道를 단속하면서 학제간 대화를 막아왔다.

또 있다. 이런 침묵의 카르텔은 "공자를 전공하면 공자가 옳고, 플라톤을 전공하면 플라톤이 옳다"라는 전공주의에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 정세근 충북대 교수(철학)는 "과연 그럴 필요가 있을까. 철학은 비판을 통한 발전인데"라고 탄식을 한다. 타자의 이견을 용납못하는 '전공변호인'의 자세에서 제대로 된 토론문화가 생겨날 순 없는 일이다.

이렇게 펼쳐놓고 보면, 다른 영역에 대한 말 걸기는 해석공동체의 헤게모니적 긴장을 눈치보고, 학문하는 자세와 전문가/비전문가의 위치에 대한 고민을 안겨주며, 동업자간에 식량문제를 건드릴 수 있느냐라는 자조적 내면탐색도 요구하는 복잡한 문제가 된다.

어떤 이들은 요즘 들어 학제간 연구와 대화가 많이 진행되고 있지 않느냐고 자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감을 나눠들고 분업해서 완제품을 조립하는 '생산의 시스템'을 엄정한 평가문화와 혼동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을..."
지난 2001년 교수신문과 '오늘의 동양사상'에서 벌어졌던 동서철학자간 난타전은 학자세계에서 타전공 비판이 왜 어려운 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서양 형이상학을 전공한 김진석 인하대 교수가 동서양 철학의 전반적 문제를 짚으면서 동양담론의 거품을 지적했는데, 이 글이 나간 후 동양철학계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디서 그런 얘길 하느냐"고 발칵 뒤집혔다. 토론자는 많이 나왔지만 생산적인 논쟁은 없었다.

홍성민 동아대 교수(정치학)는 '한국학문의 정체성과 학자들의 아비투스'라는 글에서 지식인의 학문적 활동이 사회적 제약에서 자유롭다는 환상을 버려야 하고, 지식생산의 일정한 학문적 전제가 발휘하는 상징적 폭력을 자각하라고 주문한다. 그리고 해석공동체 속에서 진행되는 '사용할 수 있는 용어'와 '사용할 수 없는 용어'라는 이분법적 배제를 문제삼고 있다. 홍 교수는 이런 전제 아래 하이데거를 전공하는 철학자들의 텍스트주의를 정치학적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다. "'존재와 시간'의 난해성은 하이데거가 당시 카시러와 훗설로 대표된 신칸트학파에 대해 적대적이었으나, 이걸 고도의 형이상학적 언어로 은폐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하지만 이것을 하이데거의 정치적 의도 운운할 게 아니라, 그의 학문적 성향과 무의식, 즉 학자적 아비투스가 형성되는 과정"으로 보라고 덧붙인다.

이런 식의 타 전공 비판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때론 필요하다. 가장 비근한 사례를 우리는 아카데미에 갓 입성한 '영화학'에서 엿볼 수 있다. 영화학자들은 비전문가들(인문학, 사회과학, 문인)이 영화를 논하는 게 영화를 타학문에 종속시키는 도구화를 낳고, 비전문적이고 단편적인 해석에 머문다며 "영역침해"를 주장한다. 하지만 영화평론가 정영권씨가 '모든 학문과 지식으로부터 배우자'란 글에서 잘 주장하고 있듯이 이는 사실과 다르다. 과연 철학이나 법학을 위해 영화를 끌어들이면 그게 도구화인가, 여기에 대해 그는 순수하게 영화를 영화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한가를 묻고 있다. 또한 비전문성 문제도 영화학자들의 글쓰기가 고도의 전문성을 갖추고 있는가를 비교해볼 때 확신할 수 없고, 단편성의 문제 또한 논문 형식주의에서 비롯된 발상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영화학자로서 정영권씨는 안경환 서울대 교수가 쓴 '이카루스의 날개로 태양을 향해 날다'라는 책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안 교수가 영화 '뉘른베르크의 재판'을 이야기하면서, 2차 대전 직후 나치 전범재판에 적용된 국제법의 원칙, 영화 속 변호사, 검사, 피고 등의 증언에 내포된 정치적 입장 등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에서 명쾌한 해석을 얻었다. 반면 철학자 조광제가 '블레이드 러너'를 논하면서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을 끌어들여 난해한 메시지의 영화를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 점이나, 안 교수의 영화분석이 미국을 미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비판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영화전공자가 역사학자 마르크 페로의 '역사와 영화'는 읽으면서 한국의 역사학자 연동원이 쓴 '영화 대 역사'를 외면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예리하다.

논문주의의 울타리를 벗어나라
논문이 아니면 상대를 안 해주는 '잡문기피증'도 대화를 막는 걸림돌이다. 이런 논문주의는 얼마 전 복직된 마광수 연세대 교수 사건에서 그 실정을 찾아볼 수 있다. 마 교수가 2000년 6월말에 재임용을 위한 업적물로 에세이집 '자유에의 용기', 문화비평집 '인간', 장편소설 '알라딘 신기한 램프' 등 단행본 3종, 논문 및 기고문 6편, 2편의 단편소설 등을 제출했을 때, 국문과 인사위원회는 '학문적 능력의 결함'을 이유로 재임용 불가의 결정을 내렸다.

이 문제는 결정의 타당성을 두고 학술권력 문제와 지식인의 글쓰기가 어때야 하는가라는 자성을 불러왔다. 계간 '사회비평'에서 문학평론가 장석주 씨는 "서론, 본론, 결론의 구도 아래 구축하는 글쓰기, 이러저러한 각주가 따라붙고, 연구사 비판과 연구방법이 적시되는 글쓰기를 통해서만 학술적 가치와 의의를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가"라고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굳이 니체나 벤야민의 탈규범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글쓰기의 零度같은 건 없다"라고 답변할 수 있다. "논문은 공시적 구조나 틀이 아니며, 기호론적 관계로 환원될 수도 없다"라든지, "학문은 창의이기 이전에 관습이며, 천재이기 이전에 모방이며, 상상이기 이전에 전통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탈논문주의자들의 주장도 꾸준히 제기돼왔던 탓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그 동안 꾸준한 문제제기를 해온 사람들은 주로 '전공이 불확실한' 한국적 학문을 모색하는 학자들이었다. 하지만 자생학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돌아온 서양학자들의 반응은 '서양적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고, 동양학자들의 반응은 '동양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논문, 전문성, 과학성, 본래성 등으로 운위되는 전공자들의 자리 고수는 '단선성'과 '전체성'에 대한 강박성을 포함한다. 불완전한 것을 용납 못하는 순결성의 강조는 근대사 전공자가 고대사 사료는 읽지도 못하게 하는 편식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한다. 전공주의의 안락한 울타리를 벗어나 동시대의 동학들과 진지한 논박을 벌이려는 노력 없이 우리 학문은 바다 건너편의 시아버지를 모시는 며느리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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