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惑愛(혹애), 작가 머리말
惑愛(혹애), 작가 머리말
  • 교수신문
  • 승인 2020.02.28 14: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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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지식인'에게 닥쳐든 세밀한 고뇌를 탐구하며...

'혹애(惑愛)'라는 말은, 마음을 사로잡힌 사랑이란 뜻이다. 누군가에게 홀딱 빠진 마음. 그게 혹애다. 평생을 '경(敬)' 한 글자를 붙들고 살았기에, 걸어다니는 성인으로 일컬어졌던 분. 조선 천지가 그 앞에 무릎 꿇고 옆나라 일본에서도 경배를 일삼던 퇴계 이황(1501~1570)에게 '홀딱 빠진 사랑' 이야기를 붙인다는 건, 그야 말로 천추의 불경(不敬)죄처럼 보일지 모른다.

퇴계가 어느 여성을 향한 '혹애'를 감행해 후세의 입방아를 낳았다고 말한다면, 당장 그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고 곳곳에서 팩트체크가 들어오기 딱 좋은 상황이다. 오케이. 그런 터무니 없는 주장을 제기할 생각은 없다.

다만, '혹애'라는 말은 퇴계가 즐겨썼던 말이다. 여성에게 쓴 표현은 아니고, 매화라는 꽃식물에 썼다. 매화를 남녀가 성애를 느낄 때의 감당못할 자력처럼 사랑한다는 심정으로 '혹애매(惑愛梅)'라고 했다.

이쯤에서 되묻자. 매화를 혹애하는 것은 죄가 아니되, 여성을 혹애하는 것은 죄가 되는가. 퇴계가 매화를 혹애한 만큼 여성을 혹애했다는 건, 왜 허물이 되는가. 그 여성이 매화의 기품과 매화의 아름다움과 매화의 정신성으로 퇴계를 사로잡았다면, 그건 또 왜 퇴계를 낮추는 일이 되는가. 마치 퇴계의, 매화에 대한 혹애를 아름다운 은유로 조심스럽게 새겨낸 것 같은 사람, '두향(杜香)'을 보라. 퇴계의 조선 중기를 살아갔던 한 기녀로 '몸'을 입었지만 매화의 정령(精靈)이다.

'두향'은 두보의 향기라는 뜻을 품는다. 두보의 '강매(가람의 매화)'를 기억하는가.

梅蘂臘前破 梅花年後多(매예납전파 매화연후다)
매화 꽃심은 섣달 전날에 터지지만
매화 꽃잎은 새해 첫날에 벙그는구나

絶知春意好 最奈客愁何(절지춘의호 최나객수하)
봄날이 좋은 줄 문득 알았는데
이걸 어쩌나 나그네 근심을

 

두보의 향기를 그대로 전수받아 매화인신(梅花人身)이 된 이가 바로 두향이다. 이 두향을 혹애한 성인을 그린 이야기에 대중적인 상상력이 개입되었다 하더라도 어찌 이것이 퇴계의 허물이겠는가. 오히려, 조선시대 우리 인문학의 품격과 수준을 말해주는 '아름다운 높이'가 아닐까.

이번에 교수신문에서 <惑愛(혹애)...퇴계, 사랑을 하다>라는 제목의 '인문학소설'을 연재하기로 한 것은, 역사적으로 비중있는 한 인물에 대한 허황한 물의(物議)를 키워 세간의 소음을 돋우겠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퇴계의 단양군수 시절을 가상현실 공간처럼 복원해내면서, 40대 후반의 '큰 지식인'에게 닥쳐든 세밀한 고뇌를 탐구하는 풍부한 행간(行間)이기를 바랄 뿐이다. 이 황망한 삶 속에서 사랑은 무엇인가, 그것을 퇴계에게 물었을 때 무슨 대답을 얻을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는 작품공간 속에 작가가 하나의 배역을 맡으면서 직접 끼어들어 이야기의 줄거리를 진행해가는 기이한 전략도 있다. 공서(空嶼)라는 인물은 '빈섬'이라 자칭하는 이 사람의 아바타이다. 굳이 그를 넣은 까닭은, 작가 또한 그 공간 속에 몹시도 들어가 숨쉬고 싶기 때문이다. 그 안에 들어갔을 때 바라볼 수 있는 시공간은 밖에서 필자의 입장에서 상상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퇴계는 두향이 건네준 도수매(倒垂梅, 가지를 늘어뜨린 매화로 능수매, 수양매라고도 한다) 한 그루에 크게 느낀 바 있어 시를 쓴다. 이 시는 퇴계가 평생 역설한 '경(敬)'이 감동적으로 녹아든 최고의 철학시가 되었다. 가장 깊이 꽃봉오리를 내린 매화와 그것을 하나하나 바라보기 위해 더 깊이 고개를 숙이는 성인의 모습은, 이 분이 투철한 철학자일 뿐 아니라 빼어난 시인임을 유감없이 느끼게 한다. 이 소설은 전체가. 하나의 도수매를 보는 느낌이었으면 한다. 꽃잎들이 바람에 잘 일렁이길 빈다.

이상국 / 작가, 시인. 아주경제 논설실장
이상국 / 작가, 시인. 아주경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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