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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혼인 살리기
문화비평-혼인 살리기
  • 김영민 한일장신대
  • 승인 2003.10.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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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 제도는 이미 고장난 상품이다. 혼인은 단지 ‘상품’일 뿐 아니라 최고가의 필수품인데, 우선 필수품이 고가라는 사실 속에 이 제도의 기초적 역설이 숨어있다. 그리고 반품율이 50%에 이르는 이 고가의 상품이 여전히 불티나게 팔린다는 사실 속에 그 역설은 누증한다. 제도로서의 혼인은 대안이 없는 자가당착의 실체를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헤겔처럼 말하자면, 이념은 제도 앞에 누추하게 탈진하-얐-다!

제도의 덫에 물린 혼인을 되살리려는 시도들에도 백화쟁명의 과거가 있다. 최근 공적으로 부상한 부부 스와핑조차 ‘혼인 살리기’의 일환으로 해석되는 것은 바로 그 제도모순의 역리를 설핏 드러낼 뿐이다. ‘혼인 살리기’의 전통적인 방식은 聖化와 自然化의 이데올로기나 의식이다. 혼인을 聖事로 격상시키고, 치렁치렁한 의식을 제공한 것은 대부분의 종교에서 공통되는데, 이것은 가족제도가 학교나 사원과 더불어 사회체제의 매끄러운 輪動을 정당화하는 기초 단말기라는 사실과 깊이 연루한다.

혼인을 성사화하려는 시도는 여전하지만, 원칙상 그 시도는 중세적이다. ‘우신예찬’(1511), ‘유토피아’(1516), 몽테뉴의 ‘수상록’(1580), 그리고 베이컨의 ‘에세이’(1597) 등 서구 16세기 인문주의자들의 ‘잡스러운 글’들은 한결같이 혼인을 포함한 時俗에 대한 근대적 성찰의 기미를 알뜰하게 보여준다. 바야흐로 혼인의 제도도 데카르트-칸트로 이어지는 성찰/비판의 계몽주의적 系線속에 흡입, 재구성되는 것이다. 가령, 베이컨이 “처자식을 가진 사람은 운명의 손에 인질로 넘어간 자”라는 유명한 문장을 남겼듯이, 이처럼,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는 가톨릭의 혼인성사적 도그마는 이들 초기 인문주의자들의 문학적 실존주의 속에서 점진적으로 해체되고 만다.

해서, 홉스-로크-루소 등의 근대 정치철학자들이 정립해둔 ‘자연/계약’이라는 제도적 범주처럼 혼인 역시 계약적 차원 속에서 운용될 수밖에 없다.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1916)에서 제시된 恣意性의 원리는 단지 현대 언어학의 제1 명제가 아니라 근대 사상의 제도적 계약성이 얹힌 사유의 지평이 수렴된 곳인데, 이로써 (이론적으로는) 自然化/聖化의 논리는 몰락한 셈이었다. 따라서 혼인 역시 聖이나 自然과는 무관한 제도적 자의성과 계약의 영역이므로, 오직 당사자들의 궁리와 합의에 의해서 조절, 재구성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기호(혼인)와 실재(사랑)의 관계를 자연화/성화시켰던 중세의 주술적 논리와 행태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떠드는 작금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상설할 순 없지만, 여기에는 이데올로기와 체계론의 문제가 끈질기게 관여한다. 혼인의 제도가 현실의 위기를 과장하는 한편 그 자연성에 퇴행적으로 기대는 것은, 바로 그 제도가 종교와 도덕 등 기성 체계의 코드들로 중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성의 정치학’(1970)의 밀레트의 말처럼, 혼인의 자연화는 사회적 역할, 기질, 지위의 모든 범주에서 부권제 이데올로기가 체질화되도록 돕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성 지배’(2001)의 부르디외가 제시한 처방처럼, 때늦게 도덕(自然化)과 종교(聖化)로 소급할 일이 아니라, 혼인의 제도들이 탈역사화, 중성화, 그리고 자연화하는 그 메카니즘을 물어야할 것이다.

서구의 고딕 시대 이후, 시민계급의 영향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낸 것은 문화제도의 세속화이며, 그 이론적 배경은 唯名論이다. 마찬가지로 고장난 명품인 혼인 제도도 전래의 실체와 아우라를 잃은 채,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이름만 남은 꼴이다. 이름과 기호, 계약과 자의, 세속과 잡종, 그리고 文化와 文禍는 모더니즘의 총체성이 남긴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이다. 이 흔적 속의 제도는 덫에 물려 살아가는 자가당착에 이르렀으니, 그 누가 혼인을 살려낼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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