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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민초들은 '他의 파괴' 아닌 '自의 건설' 외쳤다
그날 민초들은 '他의 파괴' 아닌 '自의 건설' 외쳤다
  • 이진영
  • 승인 2020.02.21 0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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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보드래 고대 국문과 교수
제60회 한국출판문화상 수상작
『3월1일의 밤』 니은서점 북토크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는 학술서에도 문학적 감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는 평을 받으며 2019년 12월 제60회 한국출판문화상 저술(학술)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된 책 『3월1일의 밤』(권보드래 저)은 한국일보 외에도 한겨레신문과 동아일보가 선정한 ‘올해의 책 10’에 이름을 올렸다.

100주년이라는 떠들썩한 관심을 지나 101번째 3·1절을 얼마 앞둔 지난 2월 14일 서울시 은평구 연서로 니은서점(www.facebook.com/bookshopnieun)에서 『3월1일의 밤』 북토크가 열렸다. 서울·경기지역에서 모인 독자 20여 명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 150분을 훌쩍 넘기며 이어진 저자와의 대화를 소개한다.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시작은 우연이었다. 2000년도에 박사학위 논문을 마치고 우연히 도서관에서 펼친 3·1운동 신문(訊問)조서에서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과 교수는 낯선 이야기들을 만났다. 만세를 왜 불렀는지 묻는 검사의 질문에 “독립한 줄 알았다” “만세가 무슨 뜻인지도 모른다”고 답하는 사람들은 거대 담론에 익숙한 세대로서는 낯설고도 엉뚱한 민낯이었다. 변명하고 발뺌했던 바로 그들이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서 독립만세기를 만들고, 등사기를 장만해 새벽마다 격문을 돌리고, 이웃이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도 다음 날 헌병주재소를 향해 행진했다. 이들은 누구인가? 권 교수는 “매일 같이 자료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말한다.

연구는 1910년대 세계사를 다시 이해하면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었다. 1910 멕시코혁명, 1911 신해혁명, 1914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917 러시아혁명, 1918 독일혁명과 종전 등 세계사적 변동의 여파가 이 땅에까지 미치며 공명한 사건이 3·1운동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이 보았던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거대한 변화가 일어날 때 다른 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조선인들 역시 이상할 정도의 열망과 희망에 차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저자는 이를 해방, 변혁, 평화라고 이름 붙였다. 그 당시 조선인들은 자기를 온전히 표현하기(해방), 세상을 바꾸기(변혁), 변혁에 대한 다양한 생각의 공존 가능성 넓혀가기(평화)를 바랐다는 게 작가의 생각이다.

 

3·1운동은 빛나는 경험

3·1운동은 많은 이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면서기라도 하기를 소원하던 소시민들은 내가 외친 만세가 수백 수천 명과 어우러지는 걸 보면서 목숨 걸고 뭔가를 추구하는 순간을 경험하고,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다. 그럭저럭 자족하던 사람들이 민족과 혁명이라는 대의에 투신하고 사회운동가로 변신했다. 배움에 대한 열망도 불타올라 통영 우체국 서기였던 유치진이 일본 유학길에 오르고, 천안군 고원(雇員)이었던 이기영은 늦깎이 공부를 결심했다.

3·1운동에 자극받고 한반도를 떠난 사람도 2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교통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 중국과 러시아, 미국, 유럽으로 진출한 그들 속에는 혈혈단신으로 시베리아, 아제르바이잔까지 간 18-19살 여성들도 있었다. 미국과 러시아군에 합류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들도 작가가 추적한 경우만 백여 명이 넘는다. 만세 한번 부르지 않았지만 평생 영향받은 이들도 부지기수. 그들에게 3·1운동은 어떤 경험이었을까. 직접 참여하지 않은 사람도 책에서 여러 명 다룬 이유이다.

세계화에 대해 생각하고 수많은 죽음과 폭력을 목격하면서 3·1운동의 청년세대는 생의 비애와 죽음의 공포에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감성·사상·문학을 개척해갔다.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청년들은 고민하며 길을 만들어갔다.

 

모든 존재를 품는 사회

권 교수는 이 책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3·1운동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지 묻고 싶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교통·통신도 미비했던 100년 전 전국적 조직이나 지도체도 없이 시작되어 전국 곳곳에서 이어진 밤낮의 면면을 알리고 싶었다. 세계적 평화론을 알리 없는 갑남을녀들은 무엇 때문에 목숨 바쳐 평화를 추구했을까?

 「기미독립선언서」가 타(他)의 파괴가 아니라 자기 건설이 급선무라고 밝히고 있듯 그들은 대결할지언정 누구도 제하지 않았다. 적대와 분열이 기승을 부리는 오늘, 100년 전 3·1운동에 참여했던 대중은 말없이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니은서점 북토크에서 3·1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권보드래 고려대 교수
니은서점 북토크에서 3·1운동에 대해 설명하는 권보드래 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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