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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 건성으로, 혹은 타성으로
학이사: 건성으로, 혹은 타성으로
  • 백욱인, 서울산업대
  • 승인 2003.10.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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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욱인/서울산업대·사회학
                           
교수 생활에 제법 이력이 나면서 과연 이게 잘 살고 있는건지 되돌아보게 된다. 초가을 볕이 따스하던 날, 세미나 발표장을 향해 한강변 도로를 달리면서 난, '건성'과 '타성'과 '반성'에 대해 생각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나는 삶의 진정성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개인적 진정성과 사회적 진정성 모두를. 개인적 진정성의 정점은 詩이고, 사회적 진정성은 실천적 행동으로 꽃핀다. 현시대는 이제 그런 시와 행동에서 멀어졌다. 그 자리를 영화와 채팅이 대신한다. 1980년대에 우리는 최소한 개인적 진정성과 사회적 진정성간의 조화로운 비율을 나름대로 떠안고 감당했다. "네 눈은 피를 흘리지 않고 있다"라는 김수영 시인의 경고는 도처에서 수시로 우리를 엄습했다. 그래서 진정하지 않은 행위와 생각은 용납되지도 될 수도 없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더 이상 진정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 수 있었다. 그러면서 더러는 건성으로 또는 타성으로 그렇게 삶을 살았고 살고 있다. 그래도 타성으로 사는 삶은 기본은 유지하고, 건성의 삶은 아무 것도 아닌 삶을 살다가도 쿡 찌르면 '엉' 하고 놀라는 최소한의 조건반사는 한다. 초가을 날 한강변을 달리다가 문뜩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자신의 모습이 차창가에 어렸다. 건성과 타성으로 얼버무린 생활에 익숙해진 자신의 모습은 부끄럽기도 했지만 뻔뻔스런 것이었다.
학교로 가는 강변 도로에서 이리 살면 안된다고 핸들을 꺾으며 엑셀레이터를 힘주어 밟는다. 그렇다고 영화 '훼드라'에서처럼 절벽으로 내리 달려지르는 그런 신화적 행위는 감히 엄두도 못낸다. 그래, 건성과 타성을 넘어 일단 반성이라도 시작하자고 마음을 다진다. 건성과 타성으로 맨질맨질해진 인생은 누구에게 어디서 재신임받아야 할까. 재임용은 학교에서 정기적으로 해주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자신의 진정성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타성으로 공부하고 이것저것 신경써서 챙기면 재임용 정도는 아직까지 교수자리 지키기에 크게 위협적이지 않다. 건성으로 공부하고 강의해도 그럭저럭 학기를 넘기면 그만이다. 학교와 학생에게는 건성과 타성으로 넘어간다 치자. 하지만 자신에게까지 그렇게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학회 발표장에 도착했다. 늘 그렇듯이 건성과 타성으로 버무려진 몇 안되는 참석자들과 함께 발표를 시작한다. "아, 건성과 타성의 슬픈 인간들이여." 끝나고 예의 주최측 80%, 도장찍기 20%의  낯선 얼굴들과 점심을 하면서, '저 사람들도 날 괴물로 보겠지'라고 생각했다. 자랑거리도 아닌 한때의 정치적 경력을 무기삼아 허세를 부리는 건성 학자와 젊은 후배의 말싸움을 뒤로하고 서둘러 자리를 떠나면서 잃어버린 진정성을 어디 가서 찾아야할지 깜깜했다.

반성을 그만둔 그 때부터 우리는 건성과 타성의 늪에 빠져버린다. 지나간 진정성의 시대를 그리워하거나 타성을 강요하는 현실을 비난하는 데 머물러서는 아무 것도 새로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여기'에서 건성과 타성을 넘어 반성을 시작해야 한다. 그를 통해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삶의 현실 안에서 '범속한 트임'의 나날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래서 이 가을에는 불쌍한 이 영혼도 건성의 적당함과 타성의 틀을 벗어 던지고 살아있는 현실에서 진정성을 되찾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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