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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 연구의 또 다른 방법, 체험주의
민속 연구의 또 다른 방법, 체험주의
  • 이진영
  • 승인 2020.02.20 17: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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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체험과 행동이 인간의 사고에도 영향
지역마다 고유한 시공간의 경험이 응축된 게 민속

체험주의 민속학: 민속과 구술문학의 체험주의적 이해
저자 표인주|출판사|박이정|페이지 612

인류사에 컴퓨터가 등장함에 따라 일부 학자들이 사람의 뇌를 하드웨어로, 마음을 소프트웨어로 간주하면서 인간의 사고에 대해 연구하는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이 1950년대 후반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인지과학의 초창기에는 뇌의 중요성에 비해 몸의 역할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외부 세계의 정보가 몸의 감각기관을 통해 뇌에 전달되면 뇌가 그것을 처리해 지시를 내리고 몸의 운동기관이 행동으로 옮긴다고만 본 것이다. 그러다 1980년대 후반부터 이러한 관점에 도전하는 이론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몸의 감각이나 행동이 뇌의 정보처리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었다. 인간의 복잡하고 추상적인 사고가 신체적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는 체험주의(experientialism)의 시작이다. 

인간이 공간과 시간의 경험을 통해 형성해온 생활양식은 자연환경, 사회적 배경, 역사적 사건 등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을 어떻게 체험하는지에 영향을 받으며 뿌리내려 왔다. 민속은 이러한 생활 습속 전반을 가리킨다. 따라서 민속 연구의 관심 역시 문화 전승의 최소 단위인 가족과 마을, 사회 등 공동체의 기능과 생활 습속의 상징성을 파악하는 데 있어 왔다. 이러한 민속 연구가 확장되기 위해서는 텍스트 중심의 연구로부터 벗어나, 인간이 다양한 방법으로 자연을 경험하면서 형성해온 삶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 민속학 연구가 체험주의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민속에 대한 탐구는 인간의 본성, 나아가 우리의 현재 상황을 이해하고 미래를 조망하는 데도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 있다. 과거는 그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축적되어 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파편적인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지속적인 개혁의 과정이며,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그 과정의 끝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속학은 과거에 대한 탐구인 동시에 현재와 미래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저자는 체험주의적 민속 해석에 대해, 어떤 대상의 경험적 구조를 토대로 기호적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자 어떻게 민속이 형성되며 의미화되고 어떠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가를 연결지어 해명하고 총합적으로 의미를 탐색해 가는 과정이라 설명한다. 그동안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발표한 15편의 논문을 정리해 출간한 것이 이 책이다.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민속의 체험주의적 분석〉, 〈제2부 민속적 사물의 체험주의적 탐색〉, 〈제3부 구술문학의 체험주의적 해석〉이 그것이다. 이중 제1부에는 전남 장성군 삼계면 생촌리에서 정월에 행해지던 마을 축제를 분석해 축제공동체로서 마을공동체를 이해할 기반을 제공한다. 마을공동체가 주관하는 마을 축제는 공통의 믿음과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개최되는 연중행사로, 각 가정을 통합한 마을공동체의 문화행사였다.

특히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행해지는 공동체 민속놀이인 줄다리기는 ‘신성한 공간(외부)의 풍요(복)를 잡아당기는’ 놀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줄다리기에서 고싸움놀이가 발생했다고도 하는데, 고싸움놀이가 재액을 ‘물리치는’ 놀이인데 반해 줄다리기는 복을 ‘잡아당기는’ 놀이라는 점에서 구분된다. 당김과 밀침이라는 다른 신체적 행동에서 상이한 의미가 형성된 것이다. 

민속현상에 나타난 자연물들이 어떠한 관념에 따라 어떻게 은유화되고 어떠한 경험구조를 바탕으로 의미를 갖게 되는지를 살핀 제2부에서는 물, 불, 꽃, 가축, 말(馬)의 기호적 의미와 문화적 다의성, 민속적 관념을 분석한다. 기본적으로 씻기 위해 경험한 물로부터 출발한 정화수(淨化水)는, 신앙적으로 몸과 마음의 오염된 것을 씻어내어 육신과 정신의 정화를 통해 신성한 존재로 거듭나는 방법인 목욕재계로 의미가 확장됐다. 

체험주의에서 의미 만들기의 한 과정인 의사소통은, 언어활동 외에도 표정, 몸짓, 언어 등 외부세계에서 이뤄지는 모든 활동을 가리킨다. 그중에서도 구술문학은 발화자가 자연·사회·역사 속에서 신체적으로 경험한 감정과 감성을 토대로 형성된 기호적 경험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애정의 감성은 주로 억눌렸던 감정을 표출하고 누군가에게 전이하고자 하는 시집살이민요에서 주로 발현되었다면, 다소 경쾌하고 기쁨의 감정을 승화시켜 표현하는 화평의 감성은 강강술래 등에서 나타난다. 시집살이민요가 ‘소리내기’라는 동작을 통해 슬픔이라는 감정을 표현한 노래라면, 강강술래는 ‘뛰고 밟는’ 동작으로 기쁨을 표현한 것이다. 

체험주의 연구가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져 온 국내상황에서 체험주의적 시각을 민속학에 전적으로 도입한 『체험주의 민속학』은 민속학에 접근하는 낯설고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민속학 연구에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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