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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에 묶인 유목적 삶 그리고 비장한 회화의 순수성
유행에 묶인 유목적 삶 그리고 비장한 회화의 순수성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03.10.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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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 展을 보고

윤진섭 / 호남대 미술평론가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전’이 열리고 있는 아트선재센터 2층의 전시실은 그 특이한 구조로 인해 이를 이용하는 작가나 전시기획자에게 적잖이 부담스러운 곳이다. 1/4분의 쪼갠 원의 하나에 해당하는 형태, 높은 천장과 온통 흰색뿐인 공간, 완만하게 굽은 벽면 등은 통상적인 의미의 기획 조건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공간은 실험적이거나 ‘장소 특성적’인 설치작품들에는 매우 적합한 곳이다.

가령 이번 에 검은색의 회화작품을 출품한 홍승혜의 작품이 딱 어울리는 공간을 만남으로써 더욱 진가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경우다. 홍승혜의 ‘유기적 기하학’은 곡면을 이룬 벽구조에 작품의 컨셉트를 맞춘 것으로 벽화적 성격이 강하다. 마치 허공을 향해 던져진 카드의 궤적을 연속사진으로 촬영한 듯한 검은 작품은 긴 선형의 포즈처럼 실제 그 자체도 굽어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모듈이 일정한 간격으로 증식될 때 거기서 시간의 연장을 느낄 수 있는데, 시간의 궤적은 공간의 확장과 함께 일정한 두께로 증식되는 검정색 시트지의 한 단위로 기호화한다.

모듈의 증식에 대한 홍승혜의 조형적 실험은 테트리스 게임을 연상시키는 플레시 에니메이션 작업으로 옮겨가면서 동영상으로 바뀐다. 최초에 청색 사각형으로 시작한 모듈의 실험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직사각형의 기다란 막대로 바뀌고, 이내 그것은 보다 큰 사각형이 되며, 종국에는 산산이 흩어지게 된다. 이러한 동영상은 공간탐색에 대한 홍승혜의 다각적인 연구의 산물로 볼 수 있다. 평면작업이든, 삼차원적 애니메이션이든 그의 회화는 지각과 인식, 그리고 형태에 얽힌 상호관계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서도호는 오래 전부터 유목을 주제로 설치작업을 해 온 작가다. ‘서울 집’, ‘LA 집’, ‘뉴욕 집’, ‘시애틀 집’, ‘런던 집’ 등 일련의 ‘집 시리즈’로 현대인의 숙명적 삶과 애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던 그는 이번 전시에서 ‘계단Ⅱ’를 출품했다. 뉴욕 아파트의 통로를 분홍색 은조사 천으로 재현해 ‘집 시리즈’의 연장선상에 있다. 얇고 투명한 천을 소재로 만든 일종의 ‘부드러운 조각’으로서 이 작품은 정교한 대상의 묘사가 돋보인다. 이 작품은 기존의 문화인류학이나 소통이론의 해석하적 입장보다는 미적 측면에 초점을 둘 때 더 잘 읽혀질 수 있을 것인데, 즉 개념보다는 물리적 사물이 본질을 더욱 투명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동일하게 유목적 삶을 주제로 한 양혜규의 ‘Vita Activa-자유롭게 종사하기’와 같은 작품은 미적 대상으로 봐서는 안될 것이다. 그의 작업은 전형적인 개념미술 작품과 같이 다양한 정보들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양혜규의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물들, 즉 수십 권의 책, 의자, 테이블, 조명등, 시멘트와 각목으로 만든 언덕, 형광등, 뜨개질용 실 등은 일상적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관객들의 책 읽는 행위, 글을 쓰는 행위, 뜨개질을 하는 행위가 존재함으로써 이 작품은 구체화되고 마무리된다. 따라서 결국엔 미적 대상보다는 주어진 정보와 그에 따른 체험만이 존재하게 된다.

이번 전시는 양혜규와 서도호의 설치작업, 그리고 홍승혜의 회화작업으로 구성돼 있어 설치미술이 역시 강세인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서도호와 양혜규는 모두 유목민의 삶을 주제로 해 세계 미술의 화두를 보여줬지만, 한편 이들의 작업은 유행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반면 홍승혜의 작품이 이채롭게 보였던 것은 앞의 두 작가와 달리 미술에 있어 이야기를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회화의 자율적 가치를 신봉하며, 회화를 회화이게 하는 기본 요소에 충실함으로써 회화의 순수성을 지켜나가고자 하는 그의 태도는 일종의 비장감마저 느끼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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