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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장도서목록과 신화
권장도서목록과 신화
  • 조현설 고려대
  • 승인 2003.10.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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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신화가 근래 한국사회의 주요한 문화 코드가 되었다는 말은 이미 진부한 언사에 지나지 않는다. 신화는 인문학계의 우회하기 어려운 화두가 됐고, 신화라는 표제가 들어간 책이 대중적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라 있다. 오래된 혹은 잊혀졌던 신화들이 새삼 자본이라는 주술사의 영매를 통해 영화?애니메이션?게임?대중소설 들 속에 출몰하면서 시장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신화(Mythos)는 이성(Logos)이 쇠한 우리 시대의 철학적 탐구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인기리에 소비되는 상품의 하나다. 신화적인 것은 우리 시대의 한 징후라고 할 만하다.

이같은 한국사회의 신화현상 가운데 우리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그리스 혹은 그리스 로마 신화 소비열이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 로마 신화가 수십 년이 지나도 마르지 않는 한국출판시장의 스테디셀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이윤기라는 한 유능한 소설가에 의해 리바이벌 된 그리스 신화가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고 있다. 대체 왜 이런 지식소비문화가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 소비열은 어떤 정신적 함정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현상의 복합성에 대한 시비와 분석은 접어두고 한 가지 문제만 지적해 보자. 나는 이 소비열의 일차적 원인제공자가 근대적 학교교육의 이른바 ‘권장도서목록’이라고 생각한다. 저 권장도서목록에 마르고 닳도록 등재되는 것이 그리스로마 신화였고, 우리는 모두 초 중 고등 학교 시절 학교의 ‘권장’에 따라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었고 독후감까지 썼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학교 권장도서목록이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권장이 지닌 ‘효과’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권장도서목록이 반드시 그것을 권장하지는 않았겠지만 의도하지 않은 가운데 권장된 것은 신화에 대한 어떤 편견이다. 그건 다름 아닌 ‘그리스로마 신화=신화’라는 등식이다.  

사실 그리스 신화를 새롭게 상품화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자칭 ‘신화학자’ 이윤기 역시 이 권장도서목록의 수혜를 받은 ‘학생’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나요 하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내가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는 건 그것이 우리와 무관한 게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윤기가 말하는 ‘우리’는 우리 민족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인 우리다. 말하자면 그는 인간의 보편성을 그리스 신화 속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윤기의 대답 속에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프로그램이야말로 저 권장도서목록의 교육적 효과가 아닌가.

그리스 로마 신화가 로마의 시인, 작가들에 의해 정리되고 재구성된 신화라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또한 그리스 로마 신화가 서구 문화 속에서 다양한 예술 양식으로 재창조되면서 서구 문화의 골간을 형성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윤기가 그리스 로마 신화와 그 문화를 통해 그렇게 찾고 싶어 하는 보편적 인간이란 서구적 정신을 소지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 신화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사로잡혀 신화의 전도사 노릇을 자임하고 있는 소설가 이윤기는 권장도서목록의 이데올로기적 효과 안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니 자신의 작업에 문화적 사대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의 ‘유능한’ 성실함 덕분에 그리스 신화는 한국사회에서 하나의 지적 ‘명품’으로 ‘교육받은’ 대중들에 의해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소비자들의 가슴 속에 ‘서구=보편’이라는 등식을 새기면서.

우리에게 문화적 도약을 위한 ‘절단’이 필요한 분야가 한둘이 아니겠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신화’도 그런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견줄 만한 신화를 한국 신화는 가지고 있고, 동아시아 신화에도 그런 것은 적지 않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절단을 통해 오인된 보편주의를 넘어 ‘우리’ 신화로 돌아오는 길이야말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 제대로 다가가는 길일 수 있다. 이런 길 찾기가 어디 신화에만 필요한 것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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