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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버시 사회의 씁쓸한 풍경
프라이버시 사회의 씁쓸한 풍경
  • 문순태 광주대
  • 승인 2003.10.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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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이야기

문순태 / 광주대 문예창작

내가 사는 아파트 라인에는 두 명의 경비원이 있다. 그들은 하루걸러 교대 근무를 한다. 두 사람 모두 꽤 오랫동안 붙박이로 우리 아파트에서 경비원 일을 해왔다. 주민들은 그들의 이름은 물론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다. 내 어머니께서는 오십대 초반의 체격이 통통한 안씨를 ‘안다니’, 그보다 나이가 조금 많고 깡말라 보이는 최씨를 ‘모른다니’라고 부르셨다. 아파트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을 만큼 정보에 밝다고 하여 ‘안다니’, 무엇이든지 물어보면 무조건 모른다고 하여 ‘모른다니’라는 별명을 붙이신 것 같다.

‘안다니’는 우리 통로 15층 30세대의 사사로운 정보에 매우 밝았다. 몇 호에 사는 남자는 어떤 일을 하며, 한 달 수입이 얼마쯤이고 몇 시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것까지도 환히 알고 있다. 심지어 누구와 친하고 부부의 금술은 어느 정도며 애가 어느 학교 몇 학년이고 공부를 잘 하는지 못하는지에 대해서도 정통하다.  

그러나 ‘모른다니’는 주민들의 사생활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어, 아무런 정보도 갖고 있지 않은 듯했다. “우리 애 학교에서 돌아왔어요?”라고 물을라치면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아까 돌아온 것도 같고 아직 안돌아온 것도 같고....”하며 애매한 대답을 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모른다니’에게 물어보는 일이 별로 없다.
또한 ‘안다니’ 경비원은 성격이 낫낫하여 붙임성이 좋을 뿐만 아니라, 노인들에게 친절한 편이다. 그는 노인들이 무거운 짐을 들고 오는 것을 보면 부리나케 달려 나와 성큼 받아서 엘리베이터에 실어주곤 한다. 그래서 노인들한테 인기가 많다.

“안다니는 참말로 좋은 사람이여. 명절 때는 잊지 말고 술값이라도 좀 주어라. 그 사람 내가 쓰레기 가지고 나가면 우루루 달려와서 덥석 받아준다니께.”
어머니는 그가 어른을 공경할 줄 안다면서 늘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런 ‘안다니’와는 대조적으로 ‘모른다니’는 워낙 말 수가 적은데다 언제나 표정이 뚱했고 노인들한테 별로 친절하게 대하지도 않은 듯했다. 그는 주민들이 쓰레기를 분리하지 않거나, 정면주차를 하지 않을 때에는 모른 척 지나치지 않고 시시콜콜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주민들은 쓰레기를 버릴 때도 은근히 그의 눈치를 살피는 편이다.

그 무렵 아파트입주자회의에서 관리비 절약을 위해 경비원을 한 명으로 줄이기로 했다. 주민들이 투표를 해서 득표를 많이 하는 사람을 남게 하기로 했다. 투표 날이 결정되자 ‘안다니’는 더욱 유별나게 주민들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는 족족 넙죽넙죽 인사를 했다. 그러나 ‘모른다니’는 조금도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며 분리수거와 전면주차 이행을 따지고 들었다. 주민들 대부분은 투표 해볼 필요도 없이 인기 없는 ‘모른다니’가 그만두게 될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투표결과는 뜻밖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모른다니’가 압도적인 득표를 했고 ‘안다니’는 그만두게 되었다. 우리 어머니께서는 투표가 잘못되었다면서 몹시 언짢아하셨다.

다음날 아침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앞 집 새댁한테 넌지시 투표결과에 대해 물어보았다.

“젊은 아저씨는 주민들 사생활에 너무 관심이 많잖아요. 그런 사람은 무서워요. 누구나 자기네 사생활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싫어하거든요.”

새댁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모른다니’가 많은 표를 얻게 된 까닭을 알게 됐다. 익명의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의 정보가 밖으로 새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디지털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캡슐화 된 공간에서 자기만의 성을 쌓고 살기를 원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친절이나 예절보다는 차라리 무관심의 자유로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인지도. 단절감은 참을 수 있어도 타인이 내 삶을 들여다보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 아파트 경비원 투표결과에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으며 오랫동안 씁쓸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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