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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흐름 : 창비,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성' 시리즈(전6권) 출간
학술흐름 : 창비,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성' 시리즈(전6권) 출간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3.10.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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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일본, 대만의 동아시아학자 문제의식 한곳에

동아시아를 하나의 울타리로 묶어주는 '보이지 않는 손'은 무엇일까. 서구근대에 대한 저항의 공동체인가, 아니면 EU나 대서양무역기구 등 쌍방향에서 압박해오는 경제블록들을 염두에 둔 전략적 제휴인가. 그러나 이런 정치적, 경제적 이해타산과 역사적으로 한자문화권에 속해있었다는 사실만으로 동아시아 지식인들이 서로 잘 이해하고 통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적대적 감정이라 하는데, 과연 오늘날 동아시아인들이 서로에 대해 증오할 만큼 깊이 있는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일까.

'창작과비평사'가 '창비'로 이름을 바꾼 후 펴낸 야심만만한 첫 기획시리즈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성'을 보면 한중일 삼국 사이에 가로놓인 여러 가지 장막들, 상호간 인식의 놀랍고 새로운 면들, 그리고 공통적인 고민항들이 잘 드러나 있어 그 동안 부실하게 담론공사를 해온 동아시아공동체를 쟁점적으로 사고해보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준다.

이번 시리즈는 그 동안 한국 지식인들과 친분이 있거나 이론적 대화를 거친 중국, 일본, 대만의 중요한 지식인 중에서 6명을 선별해 이들의 사상자전, 대표문선, 한국학자와의 대담을 각각 단행본 1권 속에 담아 잘 소개하고 있다. 이미 국가주의에 대한 급진적 비평가로 소개된 바 있는 사카이 나오키 코넬대 교수의 '국민주의의 포이에시스'(이규수 옮김, 이연숙 대담)를 필두로 일본 학자로는 일본 법정사상사의 근대성 구축과정을 날카롭게 잘라보는 데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는 야마무로 신이치 교토대 교수의 '여럿이며 하나인 아시아'(임성모 옮김·대담)가 소개됐다.

중국 쪽에서는 중국 지식인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잡지인 讀書지의 편집위원인 왕 후이 칭화대 교수의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한다'(이욱연 옮김·대담)와 함께, 신진학자로서 중국의 떠오르는 일본 사상통으로 주목받고 있는 쑨 꺼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연구원의 '아시아라는 사유공간'(류준필 옮김·대담), 맑스주의를 넘어선 관점에서 중국의 촌락과 기업구조를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는 추이 즈위안 메사추세츠대 교수의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장영석 옮김, 백승욱 대담)가 소개됐다. 마지막으로 대만 정부의 남진전략을 '하위 제국주의'로 분석해 명성을 쌓은 신좌파 문화이론가 천 쾅싱 대만대 교수의 '제국의 눈'(백지운 외 옮김, 백영서 대담)도 주목할 만하다.

방대한 분량으로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성 6인을 모았지만, 이 시리즈는 각각의 지식인이 학문적 경력과 문제의식을 기획자의 의도에 맞춰 성실하게 요약해주고 있으며, 대담을 통해 추가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어서 각 지식인에 대한 충분한 이해의 장을 제공한다. 하지만 대표논문 모음은 이론적 논의보다는 현상분석에 주력하고 있어서 각 나라의 사정에 밝지 않으면 따라 읽기가 조금 힘든 게 사실이다.

이번에 소개된 지식인들은 크게 사회사상, 문학, 문화이론, 경제학 등으로 전공영역이 구분된다. 그리고 2명을 빼고는 모두 미국박사 소지자거나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시리즈의 기획자가 강조하는 것은 이들이 모두 1945년 이후에 태어난 전후세대라는 점인데, 책을 읽다보면 전후세대라는 공통점보다는 국적에 따라, 유학지에 따라, 전공에 따라, 성향에 따라, 어느 학문집단에 속해있는가에 따라 드러나는 차별점이 훨씬 중요하고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들이 사유하는 아시아는 그 콘텍스트가 전부 다르다. 중국의 여류문학가 쑨 꺼가 생각하는 동아시아는 조심스럽다. 왜냐하면 중국 국민과 한국, 일본 국민이 생각하는 민족, 국가의 개념이 너무나 이질적이라는 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론적 동아시아상에 감각, 심정의 논리를 첨가하는 게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한편 같은 일본학자로서 나오키 교수와 신이치 교수는 국민국가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 나오키 교수는 마루야마 마사오 같은 경험주의적 사상가조차 식민지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는 점에서, 국가주의의 퇴출을 주장하는 반면, 신이치 교수는 국민국가론이 제도, 기구형성의 역사에 치우쳐 사상사적 작업이 부족하며, 따라서 法定思想의 연쇄사로서 동아시아를 추적해 근대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무튼 이들 지식인들은 동아시아 각국 지식인의 사유체계, 역사적 경험, 사회적 관심의 차이에 주목하고 있다. 과연 어떤 부분에서 다른지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것이다.

'사상자전'도 여러모로 읽을거리다. 천 쾅싱 교수는 미국 버밍엄학파의 지적 세례를 받으면서 문화이론을 단련시켰다. 그런 그가 미국 교수자리를 박차고 대만으로 돌아와 자리잡는 과정은 서구 유학파가 본토에 진보적으로 착지하는 드라마틱한 모습을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다. 쁘띠-부르주아 사회주의라는 독특한 길을 걷고 있는 MIT의 추이 즈위안 교수는 중국의 잊혀진 근대지식인 꾸 쥰을 사숙하고, 마르크스보다는 프루동의 관점에서 유물론을 현재화하는 등, 주체적인 사유자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매력적으로 잘 표현했다. 신이치 교수의 회고는 유력 인문사회연구소를 두루 거치면서 프로젝트 연구를 통해 관심사를 확장해나가는 모습이 아주 건설적으로 다가온다.

대담은 추이 즈위안 교수와 백승욱 교수의 '논쟁' 대담이 무척 인상적이다. 다소 애국적으로 표현하자면 한국학자의 날카로움을 과시했다고 할만큼, 즈위안 교수의 핵심적 학문전략에 대해 끈질기게 추궁해서 때론 항복을, 때론 동의를 받아내고 있다. 중국 농민문제를 "전체 사회나 전지구적 맥락과 동떨어지게 다뤘다"는 지적이나, 시장에 맞설 강력한 정부의 필요성 제기에 대해 "강력한 정부는 냉전하 미국의 정치적 지원 때문에 가능했던 모델"이라고 공박하는 부분, 정치부분의 자율적 시민사회의 성립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모순없이 양립 가능하다는 주장 등이 특히 날카롭다.

아무튼 이 책은 "2002년 월드컵 이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표상이 최초로 살아 숨쉬기 시작했다"는 어느 학자의 비유처럼, 모순과 갈등, 이해와 공존의 가능성을 품고 요동치는 동아시아라는 어떤 구체적 공간을 최초로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경제적, 정치적 동아시아론에 대한 문화적, 사상적, 비판적 동아시아론의 유려한 되받아치기를 기대해본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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