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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리뷰: 『디지털 언어와 인문학의 변형』(김성도 지음, 경성대출판부 刊, 364쪽)
주간리뷰: 『디지털 언어와 인문학의 변형』(김성도 지음, 경성대출판부 刊, 364쪽)
  • 박여성 제주대
  • 승인 2003.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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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인문학의 출사표

디지털 문명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볼터, 울머, 랜도, 마노비치, 레비 등의 논거에 토대한 이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부 ‘디지털 언어와 인문학의 변형’에서는 구전성 시대부터 디지털 환경으로 발전하는 역학과 인식론적 변혁을 진단하면서, 인문학이 스스로를 소외해 디지털 혁명의 변두리에서 관조하는 패배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한다.

제2부에서는 인문학이 융합기호학적 실천을 통해 다시금 중심부로 진출하려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이때 고전수사학에서 마련할 수 없었던 새로운 ‘말터’가 테크놀로지의 힘으로 창출되었음을 지적하는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다.

제3부는 활자시대의 텍스트와 디지털 시대의 하이퍼텍스트 글쓰기에 대한 면밀한 대차대조표를 제시하는데, 고정됐던 텍스트가 탈중심화된 리좀으로 해방되는 것을, 즉 하이퍼텍스트가 시대정신으로 정착하는 과정이 밀도 있게 그려진다. 제4부 ‘한자와 디지털 언어’ 부분은 책 전체의 호흡과는 이질적이지만, 디지털 환경 못지않게 우리의 언어-기호세계에 영향력을 가지는 한자에 대한 기호학적 숙고를 반영한다.

한편, 디지털 시대의 메타 담론이 여전히 아날로그 시대의 서사성에 빚지고 있는 이율배반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하이퍼텍스트는 다시 아날로그 텍스트로 회귀할 것인가. 저자는 ‘변형’이라는 말로 최종 판단을 유보한다. 하이퍼텍스트를 구성하는 인터페이스에서 선형적 텍스트가 원천 부정되지 않듯이, 아날로그 역학을 통해 태어난 디지털 텍스트에 아날로그 역학이 역투입되는 헝클어진 위계질서는 멈추지 않는다.

보르헤스의 ‘파편들’이 에코가 건축한 ‘장서관’으로 빨려 들어가는 광경이야말로 엔트로피가 보존되는 진정한 의미의 순환이다. 형식이 바뀌면 켄텐츠도 바뀌는가. 매체 자체가 이미 새로운 켄텐츠인가. 예찬론자들은 테크놀로지의 도입만으로도 인식의 진화에 영향을 준다고 장담했지만, 이를 곧바로 단정할 순 없다. 기호의 생산, 매개, 가공 및 분배와 수용 메커니즘의 변화가 매체를 사용하는 주체들의 행동과 인식론까지도 변화시켜야 한다. 디지털 시대의 인문학 또한 -그 과학성을 떠받치는 ‘반증가능성’의 원리를 거부할 수 없다는 점에서- 표류상태의 우리에게 던져진 하나의 양상이지 앞으로도 존속해야 할 당위성을 가지는 궁극적 양상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은 디지털 환경 속에서 언어-기호적 인식을 실행하는 주체들이 재귀관찰하지 못하는 변혁과 그 가능성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고답적 인문학이 상실한 주도권을 회복하자는 출사표이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 당사자들은 물론 정보산업의 첨단에서 결정권을 거머쥔 테크노크라트들에게도 일독을 권한다. 굳이 사족을 붙이자면, 요절한 천재수학자이자 ‘튜링 기계’의 창안자인 앨런 튜링, 백남준과 더불어 독일 하이퍼아트를 개척한 행위예술가 요세프 보이스가 프랑스인 ‘튀렝’과 ‘조셉 뷔스’로 둔갑하는데, 이 책의 명증에 보탬이 되지 않는 사소한 실수였기를 바란다.

박여성 / 제주대, 독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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