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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서평 :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에른스트 벨러 지음, 책세상 펴냄)
논쟁서평 :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에른스트 벨러 지음, 책세상 펴냄)
  • 백승영 서강대
  • 승인 2003.10.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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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론적 독법의 해석적 무례

백승영 / 서강대·철학

에른스트 벨러의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1988)는 니체 철학에 대한 해체론적 독법의 대표적인 경우로 데리다의 독법을 소개하며, 이 입장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프랑스 사상계에 등장한 해체적 독법은 형이상학적으로 각인된 체계적 해석의 틀에서 니체 철학을 해방시키려는 의도로 등장한다. 푸꼬·리오타르·라깡·데리다 등이 주축을 이루는 이 시도는 방법론적으로는 기호론을 사용하고, 전략적으로는 기호의 자의성에 대한 니체의 인식을 의도적으로 강조하여, 궁극적으로는 니체의 철학을 언어에 의한 의미파괴모델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하려 한다. 데리다-벨러의 니체 독법도 이런 해체론의 기본적 틀을 유지한다. 즉 니체 철학은 탈형이상학적 사유와 해체론적 과제를 이행하기 위한 것이며, 니체의 글 자체가 이 과제를 실천한 예이자 니체 자신의 과제에 대한 알리바이인 셈이다.

이 책에서 벨러는 데리다식 니체 독법의 특징적 면모를 부각시키는 데에는 성공하고 있다. 하지만 데리다의 관점과 자신의 관점을 차별화하지 않음으로써 데리다 독법이 갖는 문제점들을, 더 나아가서는 해체론적 독법의 문제점들을 외면해버린다. 데리다의 독법은 국내외 니체 연구사에서 도외시됐던 니체의 문체나 유고단편들을 주목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런 연구사적 의의가 데리다 독법의 해석적 무례를 경감시켜주지는 않는다.

니체 철학의 과제와 내용에 대한 시각
니체 철학의 과제는 생성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는 인간 및 이 세계의 의미와 가치를 회복시켜, 생성세계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인 "디오니소스적 긍정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이분법에 대한 거부, 유일한 설명원리로서의 힘에의 의지 상정, 존재와 생성의 일치를 말하는 생기존재론,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강도높은 반박인 관점주의적 인식이론, 가치창조의 주체로서의 위버멘쉬와 신체 사유를 중심으로 하는 인간학, 주인 및 승인의 도덕을 말하는 도덕론은 모두 이 과제수행의 측면들이다.

이런 과제와 내용은 니체의 글 전반에서 니체 자신의 언어로 직·간접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반면 데리다에게 니체는 완전히 다른 얼굴로 등장한다. 해체론자의 얼굴로. 그래서 데리다의 독법은 니체 철학의 과제인 '디오니소스적 긍정'을 단지 오류도 진리도 없는 기호세계에 대한 긍정으로, 니체 철학의 여러 내용을 단지 형이상학적 욕구를 종식시키기 위한 수사학적 장치로, 니체의 언어를 총체적 의미가 부재하는 차이들의 놀이터인 텍스트로 축소시켜버린다. 이런 독법은 니체 철학의 전 내용을 공허한 기호의 유희로 환원시켜버리는 것이다. 니체의 수많은 (비해체론적!) 텍스트들을 철저히 무시하거나 무화시켜버린다. 이것은 해석자의 무례가 아닌가.

해석학적-형이상학적 독법에 대한 시각

니체는 체계성과 통일성 및 전체성을 중시하는 철학자는 아니었다. 그런 것들이 필연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단편적 글쓰기를 하며, 자신의 철학내용이 체계화되지 않기를 바랬다. 데리다의 니체는 이 점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하지만 니체는 자신의 각 저술의 핵심내용과 주장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또 자신의 철학내용에 대해 지치지 않고 해명하고 또 해명한다. 그리고 특히 1885년 이후부터 '힘에의 의지'라는 책을 구상하면서 니체는 세계에 대한 어느 정도 잘 조직되고 정합적인 총체적 해석을 제시하고 싶어한다. 단순한 단편적 글쓰기가 아니라, 체계성과 통일성과 전체성을 지향하는 글쓰기를 하고 싶어한다.

비록 '힘에의 의지'는 완성되지 못했지만, 우리는 그 책에 수록됐을 핵심내용이 무엇인지를 그의 유고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런 점들은 니체 철학의 비체계성을 결코 무체계가 아니라, 비록 비형식적이고 비가시적이지만 체계화가 가능한 것으로 읽게 한다. 데리다의 니체는 이 점을 부정한다. 체계와 통일성 및 전체성을 지향하는 니체 독법은 반니체적이라고 낙인찍힌다. 니체의 언어는 체계에 대한 거부 및 차이와 다원성을 인정하는 언어이기에, 그런 독법은 형이상학적-해석학적 의도에 의한 것이라고 비난받는다. 데리다가 하이데거의 니체 독법을 니체 철학을 "망친" 주범으로 지목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물론 하이데거의 니체, 즉 서양 형이상학과 허무주의를 완성시킨다는 니체상은 그간의 많은 연구성과들이 말해주고 있듯 절반의 성공에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절반의 성공만을 거둔 이유는 니체의 형이상학-허무주의 극복프로그램이 철저히 이성비판을 근거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그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데에 있다. 데리다가 생각하듯이 니체 철학에 대한 해석학적-형이상학적 접근방식 자체가 오류의 근원일 수는 없다. 그렇지 않다면 비해체적 니체 독법은 예외없이 오류를 범하는 셈이 된다.

니체를 읽는 방법은 하나일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하나의 독법만을 유일하게 적절한 니체 독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해석적 무례의 전형이다. 전혀 니체적이지도 않다.

필자는 독일 레겐스부르크대에서 '니체 철학을 해석이론으로'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니체 철학 개념 연구' 등이 있고, 니체 전집 번역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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